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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태극기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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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10-07 12:10 조회16,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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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10월은 법정공휴일의 달이었다. ‘유엔데이’라고 부른 국제연합 창설일(10월24일)은 일찌감치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지만 10월1일 ‘국군의 날’은 꽤 오랫동안 하루 건너의 개천절과 함께 10월의 달력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10월9일 ‘한글날’은 ‘노는 날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며칠 전 어느 행사 자리에서 들은 인디 가수 김대중의 ‘불효자는 놉니다’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불효자는 놉니다 울지 않고 놉니다. 월화수목금토일 쉬지 않고 놉니다.”) ‘국군의 날’과 함께 공휴일에서 빠졌다가 2013년에 재지정되어 10월의 위신을 조금은 살려주고 있다. 국경일이라면 빠질 수 없는 게 국기 게양의 기억일 텐데 이상하게도 떠오르는 게 거의 없다. 어릴 적은 게양 공간이 마땅찮았던 주거 환경 탓을 한다고 해도 나중에는 왜 그랬을까. 국민교육헌장이니 국민총화니 하는 관제 애국의 오랜 후유증도 있을 텐데, 또 이즈음은 ‘태극기 부대’가 연출하는 섬뜩함의 후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문구점에서 팔려나, 이제는 하나 제대로 장만할 때가 됐지 싶다.

 

작년 이맘때 발표한 권여선의 단편소설 <하늘 높이 아름답게>에는 생활방편으로 태극기를 팔러 다니다가 태극기를 사랑하게 된 파독 간호사 출신 여성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 시작은 아파트 단지들이 한창 들어서던 80년대쯤으로, 새로 지어 입주하는 곳에서는 꽤 많이 팔기도 한 모양이다. 계절로는 봄이 괜찮은데, 곧 현충일과 6·25가 오기 때문이란다. 태극기 행상이 거의 없는 최근까지도 마리아만은 혼자 태극기를 팔러 다녔던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이 소설이 다가가려는 인간 이야기의 은밀한 곳에 있다. 소설의 제목은 그러니까 동요 <태극기>의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에서 따온 것이다.

 

찾아보니 1883년 고종 때 국기로 제정·공표된 태극기가 지금의 형태로 확정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다. 초등학교 시절 태극기 그리는 과제를 한 기억은 있지만 아직도 건곤감리 4괘는 자신이 없다. 나 개인의 문제인지 모르나 이상하게 친밀한 느낌이 적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가 신선하게 다가왔다면, 무엇보다 태극기가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정부 수립 무렵 완고한 남존여비의 가부장 집안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아가 체득한 생존 전략은 최대한 자신을 숨기는 것이었고, 열아홉살 나이에 파독 간호사로 이 땅을 떠날 때도 가족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소설은 일흔두살의 나이로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뒤 비교적 가깝게 지낸 성당의 성도들이 그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마리아가 혼자 진통제를 투여하며 죽음의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생을 고단한 노동과 고독 속에 살다 세상을 떠난 이 여성에게 태극기가 은밀한 ‘희열과 공포’의 사물로 다가온 순간을 상상하는 소설의 시선은 작가 세대의 여성들이 그 앞 세대의 여성들에게 내미는 뒤늦은 연대와 이해의 간절함을 품고 있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 소설 속 한 인물이 제기하는 ‘고귀함’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고귀함’이라는 단어도 태극기만큼이나 내게는 멀게만 느껴지지만, 세상이 자신에게 부과한 부당하고 모욕적인 시간을 묵묵한 겸손과 노동, 고독 속에 처리해갔을 마리아의 모습은 그 시대적 세대적 한계의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역사에서 지워져간 무명과 무언의 인간들을 어떤 부끄러움 속에서 상상하게 해준다.

 

마리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생전의 기억을 나누는 가운데 가을 바자회가 끝나가는 파라솔 아래의 성도들은 생각과는 달리 자신들이 마리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아일랜드 작가 존 밴빌의 소설 <바다>(정영목 옮김, 문학동네)에서 주인공은 수십년을 같이 살았던 죽은 아내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빨리 닳고 깨어져나가기 시작하는 데 놀라면서 자신이 아내를 제대로 알기나 했는지 자문한다. 그의 첫 변명은 예상할 만한 수준이다. “나 자신도 요것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자기 검토는 조금 더 신랄해진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서로를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아가서, 우리가 바랐던 것은 바로 그것,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조금 과도한 느낌도 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너무 빤하게 안다고 자신하고, 그 앎을 도덕적 윤리적 선고로 쉽게 바꾸는 이즈음의 세상에서는 일부러라도 챙겨두고 싶은 생각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9년 10월 1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1626.html#csidxabf382d77e72b0db11468d23fe508d3 onebyone.gif?action_id=abf382d77e72b0db11468d23fe508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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