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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인권에 대한 공격, 어떻게 막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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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12-13 15:37 조회14,3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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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한국인권학회가 동계 학술대회를 열었다. 한국 사회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인권에 대한 공격이 어떤 양상을 띠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또 인권운동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다루었다. 인권 운동가들과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중지를 짜낸 결과의 일부라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대다수 참석자가 인권에 대한 공세의 수위와 범위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런 공격은 처음엔 인권조례를 반대하는 극소수의 목소리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인권조례뿐만 아니라 평등, 다양성 등의 가치를 담고 있는 각종 조례와 정책들 일체를 반대하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 공격을 받는 대표적 집단인 성소수자와 난민을 살펴보자. 누가, 어떤 식으로 이들을 공격하는가. 성소수자에 대해 개신교 쪽의 문제제기가 제일 강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실증 조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주요 종교들 중 개신교가 성소수자에게 가장 부정적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교인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착한 의도에 기반한 ‘선도’ 행위이며 그것이 곧 ‘사랑’이라고 믿는다.

 

목회자를 잘 따르고 그 설교를 신뢰할수록 성소수자에 부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는 점도 특이했다. 한국의 개신교에서 목회자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기성 교회 성직자의 권위에 저항하면서 출발했던 개신교에서 프로테스탄트 본연의 가치가 전도되어 나타나고 있다.

 

개신교 중 어느 정도가 동성애를 거부하고 공격하는지,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다. 확신을 품고 성소수자를 거부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므로 이들을 ‘극우 개신교 근본주의 세력’이라 칭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것이 개신교 전반에 퍼져 있는 현상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극소수의 주장이 과잉대표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난민의 경우는 또 다르다. 한국인이 난민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대략 세가지이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 열등한 존재, 가짜 불법 체류자. 이런 편견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에게 난민의 특수한 처지를 설명하기도 어렵고 설명해봤자 잘 통하지도 않는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근본적 차원에서 타자화된 집단이 난민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난민에게 “돌아가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온다. 난민에게는 이 말이 “돌아가 죽어라”로 들릴 것이다. 그래서 난민들은 가장 쉽게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들에 대해 분노하는 일부 급진 그룹의 행태도 그렇게 설명될 수 있다. 진보적 일관성이 유독 난민에게만 해당되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난민이나 이주민이 한국민의 돈을 축낸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 우리도 어려운데 왜 이방인에게 혈세를 제공하는가 하고 화를 낸다.

 

난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끼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리를 내곤 한다. 온라인 메시지와 오프라인 행동이 가장 신속하게 가장 폭넓게 확산되는 영역도 난민 반대 운동이다. 촛불혁명으로 민주시민 의식이 결정적으로 높아졌지만 그것이 국민국가에 국한된 배타적 시민권 의식으로 잘못 귀결될 위험도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인에게 ‘보편적’ 인권 의식이란 게 과연 얼마나 있는가 하는 날카로운 질문도 제기됐다. 국제사회에서 인권 선진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것은 국위 선양형 사고방식이고 인권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내재적 보편 의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인권을 겉으로 보여주기 식의 담론으로 간주하는 것은 길게 보아 인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래에 인권의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견해도 나왔다. 과거의 인권투쟁이 ‘독재국가 대 인권 요구 시민’의 구도로 벌어졌다면, 오늘의 인권투쟁은 인권 자체에 대하여 해석을 달리하는 ‘시민 대 시민’의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국가는 차별금지법 같은 것을 제정하려 하는데 민간사회의 일부가 이를 저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조차 명목상으로나마 차별금지법의 불씨를 완전히 꺼뜨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시민들 일각에서 차별금지법을 열렬히 반대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시민 개개인의 권리 의식은 대단히 높아졌지만 그런 의식이 인권의 보편적 차원으로 확대되지 못하는, 이른바 ‘개인화된 방식’의 인권이 확산되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인권을 챙긴다”는 표현이 그런 경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완전히 사유화된 형태로, 마치 자기에게 유리한 이권 챙기듯 인권을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많다면, 그것은 인권의 두 기둥―정당한 개인 권리와 이에 근거한 정치공동체의 평화로운 존립―이 무너질 지경이 된 위험한 상황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민주제도를 악용하여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태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나왔다. 지역에 기반을 둔 의원들의 취약성을 이용해서 인권을 반대하는 세력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 주민발의제도를 악용하여 인권조례를 없애기까지 한 사례가 보고되었다. 이런 세력들은 국가인권위원회법 자체가 한국 사회 모든 인권 담론의 출발점이므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대담해졌다. 중요한 실정법조차도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엔 바꿔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소수자를 공격하는 집단의 언설은 민주사회에서 인정될 수 있는 여러 의견 중 하나의 의견이라 볼 수 없으므로 원칙적으로 배격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반면 그런 사람들을 확신형의 소수 열성파와 다수의 소극적 동조자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후자에게는 교육과 설득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나왔다. 개신교 지도층의 중재자 역할을 기대하는 견해도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인권 거버넌스를 구축하려면 정치인이나 행정가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나왔다. 주민 스스로가 조직화하고 자력화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토 세력의 눈치를 보기 쉬운 정치인들만 믿고 앉아 있을 순 없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법과 규범을 동일시해온 관행을 넘어, 전 시민적 민주 규범을 세우는 것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구구절절 설명을 요하는 인권운동의 전통적 문법을 넘어서 쉽고 설득력 있고 직관적으로 와닿는 구호와 설명 자료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인권정책을 미루곤 한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적 합의를 추동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토론을 듣고 있자니 인권에 대한 공격의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현재의 국면이 인권의 실질적인 퇴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전체적으로는 인권이 개선되었지만 특정한 측면에서 인권이 극단적으로 정치화되어 갈등이 초래되는 복합적 상황인지가 궁금했다. 또한 이러한 백래시(사회 변화에 대한 반발)가 오히려 인권운동을 긴장시키고 재활성화하도록 자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희망적인 기대를 해보았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한국인권학회장

 

한겨레신문 2019년 12월10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20330.html#csidx6154a8f026025038a15c31b5bd52a77 onebyone.gif?action_id=6154a8f026025038a15c31b5bd52a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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