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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정] 판문점 선언과 '양두구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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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5-04 16:35 조회10,2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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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두구육을 무한 재생산하고 있다.

북의 ‘양두구육'을 근절하겠다고 유엔 결의도 채택하고 경제제재 및 군사적 압박도 가하고 있지만 한국도 미국도 ‘양두구육'을 하면서는 실효가 없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일이다. 제나라에서 여자들이 남장하는 풍습이 널리 퍼졌다. 지금 세상에서야 여자가 바지를 입든 머리를 짧게 자르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관습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정부가 나섰다. 남장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국가의 강력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남장 풍습은 없애기 어려웠다. 몇차례의 금지령도 실패했다. 결국 제나라의 지혜로운 재상이었던 안영에게 어찌해야 할지 대책을 물었다. 그는 제나라 임금 영공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공이 총애하는 첩인 융자가 남장을 하고 다니면서 퍼진 풍습입니다. 궁중 여인에게는 남장을 허용하면서 민간에서는 남장을 금하니 이야말로 문밖에는 소머리를 걸어두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크게 깨달은 영공이 궁중 여인의 남장부터 금했다. 과연 남장하는 풍습이 사라졌다.

 

‘양두구육'으로 잘 알려진 표현이 유래한 고사다. 원전인 <안자춘추>에서는 ‘소머리에 말고기'였는데 송나라 시기에 ‘양머리에 개고기'로 표현이 바뀌었다고 한다. 양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판다고 해서 겉과 속이 다름을 지적하는 사자성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유래를 보면 새겨봐야 할 깊은 교훈이 있다. 모든 종교에서 일관되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의 마음가짐은 어때야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잘하라고 다그치기 전에 스스로는 잘하고 있는가?

 

양두구육을 들이대며 북을 비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를 약속했으면서도 왜 핵무기 시설도, 미사일 시설도 폐기하지 않는가? 2017년 이후에는 핵시험을 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핵무기 생산 및 고도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도 2017년 이후로는 중단했지만 미사일 성능을 개량하기 위한 작업들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 초에는 단거리 미사일과 유도미사일 시험발사가 부쩍 늘어나기도 했다. 국제무대에 말만 뻔지르르하게 비핵화를 걸어놓고서는 안에서는 핵무기 만드느라 바쁘지 않은가. 최근의 한-미 연합공중훈련을 핑계로 어떤 조치를 취할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말 그대로 양두구육이다.

 

겉과 속이 다르기로는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에 안전보장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북에 대한 핵 위협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평화와 번영을 원하는 염원에 부응하여 새로운 북-미 관계를 수립하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적대관계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미국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북에 대한 제재조치는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 지난 2월과 3월에 걸쳐 한반도 상공과 인근에서 미 정찰기의 공개활동도 부쩍 잦아졌다. 급기야 지난해 연기했던 한-미 연합공중훈련을 20일부터 24일까지 강행하기도 했다. 국제무대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요란하게 약속하고서는 뒤로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양두구육이다.

 

한국은 과연 어떤가? 문재인 정부도 겉과 안이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는 4·15 총선 다음날인 16일 긴급재난지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방예산 9천억여원을 삭감하기로 했다. 국회에 제출한 2차 추가경정예산안에서 F-35A 스텔스 전투기, 해상작전 헬기 같은 미국산 첨단무기 구매 예산을 깎겠다고 발표했다. 칼을 쳐서 약을 만들고 떡을 주겠다는 것이다. 과연 한반도 평화경제로 방향을 트는 것일까?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전 보수정부보다도 큰 폭으로 국방비를 매해 증액하여 2020년에는 사상 최초로 50조원 넘게 편성했다. 방위력 개선비에 배정된 16조6804억원에서 7천억원을 삭감해도 거의 16조원이 공격적인 무기체계 구입에 사용된다. 이에 비해 남북협력기금은 1조2203억원이 편성되어 있다. 남북 철도 연결사업을 재개하면 그나마 한국 내 동해북부선 건설에 쓰일 것이다. 그 기금까지 합쳐도 통일부 예산은 1조5천억원이 채 되지 못한다. 국방예산 9천억원 삭감을 문 앞에 내걸어도 통일보다는 전쟁을 위해 30배 이상의 돈을 쓰고 있다는 현실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현실은 양두구육을 무한 재생산하고 있다. 북의 ‘양두구육'을 근절하겠다고 유엔 결의도 채택하고 경제제재 및 군사적 압박도 가하고 있지만 한국도 미국도 ‘양두구육'을 하면서는 실효가 없다. 해서 양두구육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그 고사를 되돌아본다. 북을 평화와 비핵화로 견인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미국이 먼저 변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겨레신문 2020년 4월26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420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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