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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정] 도미와 독침, 아르히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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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9-03 10:53 조회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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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선의 대표 주자다. 어떤 방식으로 요리해도 맛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미튀김을 특히 좋아했다고 하지만 회로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도미가 너무 비싸다면 붕어빵(일본어로는 도미빵)으로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다. 생선 중 특이하게 도미는 겉 표면이 붉은색이다. 보호색이다. 파장이 긴 빨간빛은 바닷물 깊이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은 한없이 부드럽지만 빛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 빨간색 파장은 일찌감치 막혀버린다. 그나마 파란 파장이 200m 정도 들어간다. 그 밑으로 들어가면 빛이 없는 어두움이다. 라디오나 무선 송수신에 사용하는 전파는 이보다 깊이 들어갈 수 있지만 심해로 들어가면 전파도 힘을 잃는다. 깊은 바다는 빛도, 소리도, 전파도 없는 절대고독의 공간이다. 약 60년 전 바실리 아르히포프 제독은 그 절대고독의 공간에서 절대고민에 빠졌다. 가고심 끝에 내린 일생일대의 결단 덕분에 당신은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아르히포에게 감사하라!

 

1962년 10월 아르히포프는 카리브해에 있었다. 빛도 도달하지 못하는 바다 밑, 소련 해군 잠수함 비(B)-59에서 그는 다른 잠수함 세 척을 포함한 잠수함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 바로 위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충돌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은 케네디 정부가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등 소련의 안보를 위협하자 극약처방을 내렸다. 미국의 코앞인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했다. 쿠바의 카스트로 총리는 미국이 ‘피그만 사건’ 등으로 쿠바의 안전을 뒤흔드는 와중에 소련의 핵미사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련 군함이 핵미사일을 싣고 쿠바를 향해 접근하자 미국은 난리가 났다. 케네디 대통령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미 해군을 파견해 소련 군함의 쿠바 접근을 막고 퇴각을 요구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와중 하필 아르히포프가 승선하고 있던 잠수함 B-59가 미 해군에 포착됐다. B-59가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자 미 해군은 신호용 폭뢰들을 투하했다. 해상으로 올라와서 정체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B-59 함장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오랜 잠수로 산소도 떨어져 가고 있고 실내는 견디기 어려울 고온 상태였다. 며칠 동안 모스크바와의 연락은 끊겼다. 심해 속에서는 연락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얕게 잠행하는 동안은 미국 라디오 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다. 라디오를 통해 듣는 세상 소식은 불길한 것이었다. 미국이 해군을 파견해 곧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이 와중에 미 해군이 폭뢰를 투하하다니, 전쟁이 시작된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나? 발렌틴 그리고리예비치 사비츠키 함장은 고민했다. 이미 그에게는 전쟁이 시작되면 핵미사일을 발사하라는 사전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잠수함까지 무선 통신을 하기도 어렵고 잠수함에서 통신을 시도하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자살행위이기 때문이다. 미 해군의 폭뢰 공격을 받아 이대로 다 죽을 것이냐, 명령대로 핵미사일을 발사해 전쟁의 승리를 도모할 것이냐? 사비츠키 함장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반 세묘노비치 마슬렌니코프 정치지도원도 동의했다. 남은 것은 아르히포프뿐이었다. 그가 동의했다면 B-59는 작전계획대로 핵미사일을 발사했을 것이고, 소련의 핵공격을 받은 미국도 작전계획에 따라서 핵무기로 보복공격을 단행했을 것이다. 1962년은 미-소 핵전쟁으로 인류가 최악의 참화를 겪은 해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핵참화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아르히포프는 반대했다. 사비츠키 함장을 설득했다. 일단 해상으로 올라가서 모스크바와 확인하자. 결국 해상으로 올라와 보니 전쟁 상태는 아니었다. 핵미사일을 발사할 이유도 없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도 마무리됐다. 아르히포프의 결단 덕분에 인류 종말은 모면했다.

 

최근 국방부는 국방중기계획에 4천톤급 잠수함 건조를 명기했다. 추진 방식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일부 언론은 핵추진 잠수함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특히 <중앙일보>는 ‘유사시 중·일 찌르는 독침’이라며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핵잠수함에서 통상 미사일을 중국이나 일본에 발사한다면 그것은 한국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스스로 죽는 벌침이 될 뿐이다. 핵잠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한다면? ‘국뽕영화’의 소재일 뿐이다. 한반도, 아니 세상의 안전을 위해서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이다.

 

세상을 구한 아르히포프도 암을 피하지는 못했다. 쿠바 작전 직전 승선했던 핵잠수함에서 발생한 누출사고가 화근이었다.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겨레신문 2020년 8월23일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5899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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