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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연구노트를 통제수단 삼는 괴상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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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10-22 16:23 조회1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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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부터 정부 연구비를 받은 경우 학문 분야를 막론하고 누구나 ‘연구노트’를 작성하지 않으면 범법자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교수와 대학원생이 몇 명이나 될까? 내가 속한 문학 분야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하 ‘혁신법’)은 정부 지원을 받은 모든 학문 연구에 대해 연구노트를 강제한다. 나도 불과 3주 전에 처음 접한 생소한 법인데, 지난 5월 20대 국회가 막판에 무더기로 통과시킨 법의 하나이며 내년 1월1일부터 시행한다. 그러나 이 법은 제정 과정부터 허술했으며, 개정이 꼭 필요하다. 혁신법은 2018년 12월 의원 입법으로 발의되어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심의를 거쳤다. 법안 회부 시에 관련 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에도 넘겨졌다. 그러나 정작 교육위원회는 누락되었으며, 교육부와도 통상적인 사전협의가 없었다고 한다. GDP 대비 세계 최상위권인 우리의 연구개발비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의 행정편의주의가 의원 입법이라는 우회로를 택했다는 의심마저 든다.

 

“ ‘국가연구개발사업’이란 중앙행정기관이 법령에 근거하여 연구개발을 위해 예산 또는 기금으로 지원하는 사업”(제2조 1항)이라서 인문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공학이든 정부의 연구비 지원을 받으면 모두 이 법의 적용 대상이다. 제정 절차부터 부실한 법을 교육부 소관의 인문사회과학 분야 학술지원사업에 적용하면 숱한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아직 온라인의 국가법령정보센터에 법령 전체가 올라오지 않았지만, 과기정통부는 다양한 사업별 특성에 기반한 사업비 사용 기준의 일원화가 불가능하니 과학기술 분야 연구비 사용 기준 고시에 인문사회분야사업의 별도 기준을 포함시킨다는 입장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이는 일관된 기준 적용을 통한 연구지원 효율화라는 법 제정 취지에 어긋나니 과기정통부가 자가당착에 빠지는 꼴이다.

 

내가 가장 놀란 대목은 혁신법 제35조(연구개발과제의 성실 수행) 2항의 “연구개발과제에 참여하는 연구자는 연구노트(연구개발과제 수행 과정과 연구개발성과를 기록한 자료를 말한다)를 작성하고 관리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이다. 연구노트 작성을 이렇게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옳을까? 일자별로 실험 결과나 연구 내용을 적은 연구노트가 역사나 철학 분야에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일일까? 어떤 연구자든 학문 특성과 자신의 개성에 따라 연구 과정에서 연구노트를 포함한 다양한 기록을 남기고 보존하지만, 이 조항은 연구자 지원이 아닌 통제와 관리, 심지어 제재와 처벌이 앞서는 관료주의를 드러낸다. 제5조(정부의 책무)에서 연구자와 연구개발기관에 대해 “최상의 연구환경 조성 등 연구개발 역량을 높이기 위한 지원” “자율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제도 마련” 등의 규정이 무색해진다.

 

혁신법은 정부 중앙부처마다 연구개발비 예산 집행의 기준과 절차가 제각기 달라 벌어지는 혼선이나 도덕적 해이를 막자는 좋은 취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막대한 연구개발비 예산의 투명하고 효율적인 집행에만 매달리는 사이에 연구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침해하는 독소조항을 담은 법이 제대로 된 공론화도 없이 통과되고 말았다. 카이스트를 비롯한 과기정통부 산하 대학들의 의견은 청취했을 것으로 믿지만, 교육부 산하의 수백개 대학은 법 시행을 코앞에 두고도 아무 소식도 모르는 어이없는 상황이다. 인문사회 분야의 학자들은 하루아침에 범법자가 될 처지가 되었지만,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일률적인 연구노트 강제는 부작용과 편법을 낳는 것으로 안다.

 

우리의 총 연구개발비에서 고작 1.2% 남짓 배정받는 인문사회 분야에 속하는 나와 동료들이 지닌 불만과 소외감은 별개로 하고, 이 법을 둘러싼 진짜 쟁점은 학문 분야와 상관없이 소중한 학문의 자유, 연구의 자율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학과 교수의 자치와 자율이라는 관점에서 과기정통부 산하 대학들의 위상과 소속 교원의 법적 지위에 허점이 많음을 짚고 싶다. 그만큼 개발독재시대의 관료주의, 효율지상주의라는 그늘은 우리 고등교육 위에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현재 국가교육위원회 설치법이 발의되어 있지만, 시범 단계로 고등교육위원회를 먼저 만들어 교육부, 과기정통부, 고용노동부(한국폴리텍대학 관할) 사이에 가로놓인 관료주의의 높은 칸막이를 극복하는 게 더 급할지도 모르겠다.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했다가 거듭 시행이 유보된 ‘강사법’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말고 즉시 혁신법 공론화와 개정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경향신문 2020년 10월16일
원문보기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160300035&code=990100#csidxa54cb8821f68be48b0479427e0b4b1d onebyone.gif?action_id=a54cb8821f68be48b0479427e0b4b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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