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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자동차의 속도에서 생명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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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10-04 14:12 조회5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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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종철 선생의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간디의 물레>, 녹색평론사)는 지금 읽어도 진실을 가리키는 바늘이 살아 있는 글이다. 오래전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자동차가 없었지만 자동차산업의 성장이 사회와 경제의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 문화가 가져온 생태적 문제들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오늘날 우리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않은가?


지난 추석 연휴 때 평소에 끌지 않는 자동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왔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지만,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자기 속도를 줄이지 않으려는 어떤 저돌성들이다. 예를 들면 차선을 바꾸겠다고 신호를 보내면 속도를 줄여주든가 ‘알았다’는 어떤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전조등을 켜면서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고, 휴게소를 나와 진입하지 않으면 길이 끝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 상대방에는 관심 없다는 듯 자기 속도만 유지하는 경우도 자주 경험했다. 이는 어쩌면 나도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의 처음은 자동차를 버린 조셉 멀로운이라는 미국의 어느 대학 교수 이야기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지만 미국은 예전부터 자동차의 나라였다. 멀로운 교수가 어느 날 홀연히 자동차를 버린 이유는, “자동차가 사람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만들어놓는다는 것을 늘 실감”했기 때문이란다. 나 또한 자동차의 속도는 생명의 속도가 절대 아니라는 입장이다. 초등학생 시절에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다른 아이와 부딪친 적이 있는데, 그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 충돌의 순간과 땅바닥에 나뒹굴며 고통스러워했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인간에게 생명의 속도는 걷는 속도임을 아마 그때 몸으로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니게 만드는 자동차


자동차가 사람을 제정신이 아니게 만든다는, 멀로운 교수가 자동차를 버린 이유에는 오늘날 여러모로 되새겨야 할 통찰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 진보주의자들의 가장 큰 맹점은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과 내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무시 혹은 무지에 있는 것 같다. 사실상 대부분은 과학기술에 항복했다고 보는 게 진실에 가까운데, 심지어는 충성을 바치는(?) 태도도 보인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신체적 편리가 이른바 이상 사회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사람은 신체적 불편을 통해 다른 것을 상상하거나 아니면 그 불편을 사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가난이 시를 탄생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신체적 불편이 무찔러야 할 적으로만 간주되는 한, 인간이 달이나 화성에 가서 살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우주산업이 군사산업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산업은 단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거대한 비즈니스라는 것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지금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기 싫다는, 줄이면 나만 손해라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는 실제로 자동차를 흉기로 만든다.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의 존재 양식을 나타내는 은유이기도 하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제각각 소유 중인 자동차 자체가 우리에게 흉기 같은 마음을 만들어 준다.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에서 지적한 자동차 문화의 폐단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자동차의 속도 자체가 작고 세밀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불가능하게 하지만, 바로 그 속도는 또 자동차 운전자의 심리를 자기도 모르게 공격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선생의 따끔한 비판만 옮겨놓기로 한다. 그리고 이는 그동안 저지른 엄청난 일을 해결해야 할 당사자로서 인간이 가져야 할 일차적인 마음가짐과 관계가 있다.


‘속도’ 줄이고 함께 걸어야 할 때


이번 추석 연휴의 이상한 더위는 우리의 감성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보통 이맘때 가을 햇볕은 따갑기 마련이고 또 따가워야 한다. 풍성한 햇볕을 받아먹고 벼도 단단히 여물어야 하고 과일들도 영양분을 충분히 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마철 더위처럼 대기는 습했고 온도는 밤에도 내려가질 않았다. 나는 겪어보지 않았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의 아열대 기후 같다고들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기후변화가 불러온 현상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어쩌면 올해 여름이 앞으로 겪을 여름에 비해 시원한 여름으로 기억될 거라는 오싹한 예측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여러 대책과 방책을 촉구하고, 바뀌어야 할 것은 정치와 자본주의 체제라는 급진적인 비판도 있지만, 자기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속도는 줄이지 않겠다는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마음이 그 본질일 수도 있다.


자동차의 속도로는 자본주의를 추월하지 못한다. 오로지 생명의 속도로 ‘함께’ 걸을 때, 자본주의는 드디어 더 달리지 못하고 덜덜덜 멈춰 설 것이다.


황규관 시인 

경향신문 2024년 9월 22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922203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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