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후기(정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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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12-02 13:13 조회16,5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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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개편 이후로 포럼 및 심포지엄 후기와 후속토론은 해당 게시판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11월포럼 사회자 정홍수 선생님의 후기를 아래에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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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차 세교포럼은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를 읽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네메시스』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4년 미국 뉴어크 시의 위퀘이크라는 유대인 동네를 무대로 폴리오(급성 회백척수염, 흔히는 척수성 소아마비)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한 남성 영웅의 이야기다. 폴리오라는 유행병(감염병)이 이야기의 배경인 점을 고려해, 메르스가 한창이던 올 6월 세교 기운위에서 이 작품을 포럼에서 다루기로 결정하긴 했으나, 그런 맥락과 무관하게 함께 읽어볼 만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동신 선생은 ‘생존자 이야기’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발표를 진행했다. 화자인 어니와 주인공 캔터가 ‘도덕적으로’ 대비되는 두 생존자 유형이라는 점에 소설의 강조점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1부의 뒷부분에 가서 놀이터의 아이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화자 어니가 과연 ‘신뢰할 만한 화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두가지 차원에서 그러한데, 우선 캔터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전지적 시점과 놀이터의 아이라는 관찰자의 시점이 공존 가능한가(이 문제는 토론 후반부에 논의되기도 했지만, 3부에서 두 사람이 재회한 뒤 나눈 여러차례의 집중적인 대화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성립할 수 있는 소설의 약속인 듯하다). 그리고 놀이터와 인디언 캠프의 아이들에 대한 책임으로 괴로워하다 자기 처벌의 방식으로 자폐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선택한 캔터 선생의 태도를 ‘오만함(hubris)’(‘네메시스’라는 제목의 함의이기도 하다)으로 비판하던 화자 어니가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캔터 선생의 예전 모습을 과하다 싶게 영웅적으로 추억하는 것도 화자에 대한 신뢰를 부분적으로 거두게 만든다는 것.
이동신 선생은 이같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지위로부터 화자 어니가 캔터 선생에게 가하는 도덕적 비판의 정당성이 줄어드는 측면을 포착하고, 여기서 이 소설의 숨은 질문을 끄집어낸다. 그러니까 캔터 선생과 어니 중 ‘누가 더 오만한 생존자일까?’ 하는. “결국 캔터는 소아마비 전염병의 생존자이면서도 동시에 희생자가 아닌가? 캔터를 비판하면서 우린 매우 오래되고 추상적인 무언가에 휩싸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소아마비 전염병과 같은 비인간적인 재난으로 엮어진 캔터와 어니의 복잡한 관계가 재현하는 것은 바로 생존자들, 특히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생존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캔터는 스스로 의심했듯이 전염성이라는 신체적 질병의 보균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니는 어쩌면 그러한 전염병보다 좀더 심각하고 지속적인 폐해를 입히는 사회적 위선의 보균자가 아닐까?”(발표문)
토론자 황정아 선생은 ‘어니/캔터’의 ‘도덕적’ 대립 구도가 이 소설의 참주제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자의 의견을 첨부하면, 이 소설에서 작가는 고전적 책임 윤리에 철저했던 캔터라는 남성 영웅의 실패와 좌절로부터 자신이 살아온 20세기 전체를 돌아보는 어떤 상(像)을 포착하고자 한 것 같다. 그것이 낡은 도덕적 틀과 시대적 한계에 갇혀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캔터는 그런 한계와 동시에 고전적인 기품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화자의 지위를 어니에게 주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캔터에게 주었던 것 같다. 이 두 지점 사이의 아이러니와 긴장이 이 소설의 묘미이며, 그런 측면에서 토론 후반부에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잘 설계된 소설인 것 같다.) 황정아 선생은 폴리오에 습격당한 위퀘이크 동네를 정밀하게 그려낸 1부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이 소설에서 ‘내셔널 알레고리’의 측면을 말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지 물었다.
플로어 토론 과정에서는 ‘화자의 신뢰성’에 주목한 발표자의 문제제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3부의 신학적 질문, 변신론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고전적인 품격이 느껴지는 소설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발표자가 ‘도덕적으로 실패한’으로 (의도적으로) 해석한 ‘demoralized’(캔터에 대한 수식어)에 대해 백낙청 선생님은 말 그대로 ‘의기소침’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겠다고 이야기하셨는데, 단어 하나를 둔 해석의 차이가 이 소설의 대립 구도를 이해하는 상징적인 지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국] 님이 쓰신 글 '[제106차] 필립 로스 장편 [네메시스]와 전염병'
11월포럼 사회자 정홍수 선생님의 후기를 아래에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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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차 세교포럼은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를 읽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네메시스』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4년 미국 뉴어크 시의 위퀘이크라는 유대인 동네를 무대로 폴리오(급성 회백척수염, 흔히는 척수성 소아마비)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한 남성 영웅의 이야기다. 폴리오라는 유행병(감염병)이 이야기의 배경인 점을 고려해, 메르스가 한창이던 올 6월 세교 기운위에서 이 작품을 포럼에서 다루기로 결정하긴 했으나, 그런 맥락과 무관하게 함께 읽어볼 만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동신 선생은 ‘생존자 이야기’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발표를 진행했다. 화자인 어니와 주인공 캔터가 ‘도덕적으로’ 대비되는 두 생존자 유형이라는 점에 소설의 강조점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1부의 뒷부분에 가서 놀이터의 아이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화자 어니가 과연 ‘신뢰할 만한 화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두가지 차원에서 그러한데, 우선 캔터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는 전지적 시점과 놀이터의 아이라는 관찰자의 시점이 공존 가능한가(이 문제는 토론 후반부에 논의되기도 했지만, 3부에서 두 사람이 재회한 뒤 나눈 여러차례의 집중적인 대화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성립할 수 있는 소설의 약속인 듯하다). 그리고 놀이터와 인디언 캠프의 아이들에 대한 책임으로 괴로워하다 자기 처벌의 방식으로 자폐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선택한 캔터 선생의 태도를 ‘오만함(hubris)’(‘네메시스’라는 제목의 함의이기도 하다)으로 비판하던 화자 어니가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캔터 선생의 예전 모습을 과하다 싶게 영웅적으로 추억하는 것도 화자에 대한 신뢰를 부분적으로 거두게 만든다는 것.
이동신 선생은 이같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지위로부터 화자 어니가 캔터 선생에게 가하는 도덕적 비판의 정당성이 줄어드는 측면을 포착하고, 여기서 이 소설의 숨은 질문을 끄집어낸다. 그러니까 캔터 선생과 어니 중 ‘누가 더 오만한 생존자일까?’ 하는. “결국 캔터는 소아마비 전염병의 생존자이면서도 동시에 희생자가 아닌가? 캔터를 비판하면서 우린 매우 오래되고 추상적인 무언가에 휩싸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소아마비 전염병과 같은 비인간적인 재난으로 엮어진 캔터와 어니의 복잡한 관계가 재현하는 것은 바로 생존자들, 특히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생존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캔터는 스스로 의심했듯이 전염성이라는 신체적 질병의 보균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니는 어쩌면 그러한 전염병보다 좀더 심각하고 지속적인 폐해를 입히는 사회적 위선의 보균자가 아닐까?”(발표문)
토론자 황정아 선생은 ‘어니/캔터’의 ‘도덕적’ 대립 구도가 이 소설의 참주제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자의 의견을 첨부하면, 이 소설에서 작가는 고전적 책임 윤리에 철저했던 캔터라는 남성 영웅의 실패와 좌절로부터 자신이 살아온 20세기 전체를 돌아보는 어떤 상(像)을 포착하고자 한 것 같다. 그것이 낡은 도덕적 틀과 시대적 한계에 갇혀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캔터는 그런 한계와 동시에 고전적인 기품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화자의 지위를 어니에게 주었지만, 자신의 마음은 캔터에게 주었던 것 같다. 이 두 지점 사이의 아이러니와 긴장이 이 소설의 묘미이며, 그런 측면에서 토론 후반부에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잘 설계된 소설인 것 같다.) 황정아 선생은 폴리오에 습격당한 위퀘이크 동네를 정밀하게 그려낸 1부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이 소설에서 ‘내셔널 알레고리’의 측면을 말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지 물었다.
플로어 토론 과정에서는 ‘화자의 신뢰성’에 주목한 발표자의 문제제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3부의 신학적 질문, 변신론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고전적인 품격이 느껴지는 소설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발표자가 ‘도덕적으로 실패한’으로 (의도적으로) 해석한 ‘demoralized’(캔터에 대한 수식어)에 대해 백낙청 선생님은 말 그대로 ‘의기소침’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겠다고 이야기하셨는데, 단어 하나를 둔 해석의 차이가 이 소설의 대립 구도를 이해하는 상징적인 지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국] 님이 쓰신 글 '[제106차] 필립 로스 장편 [네메시스]와 전염병'
일시 2015년 11월 20일(금) 오후 4시 장소 창비 서울사옥 2층 세교연구소 대회의실
□ 발제: 이동신(서울대 영문과 교수)
□ 토론: 추후 공지
□ 사회: 정홍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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