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도 4월]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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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04-27 14:59 조회5,8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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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금 필요한 문학을 고민함
― 황규관 산문집 『문학이 필요한 시절』(교유서가, 2021)
양경언
(문학평론가)
황규관 시인의 산문집 『문학이 필요한 시절』 초입에는 시인이 어린 시절부터 자연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길러왔는지에 대한 글이 몇 편 실려 있다. 그중「장마」는 최근 여러 출판물 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와 같은 매체에서 환호하는 이미지들로부터 감지되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른 시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10여 년 전 간밤에 지나간 태풍이 집 근처에 있는 골프 연습장 철제 기둥을 반으로 꺾어놨을 때 “묘한 쾌감”을 느꼈다고 시작하는 이 글은 장마가 고약하게 집어 삼켰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와 그럴 때마다 장마가 뱉어냈던 절망감에 대해 언급한다. 하지만 글의 시작이 ‘묘한 쾌감’이라고 했거니와, 시인의 눈에 비친 장마로 인한 절망의 풍경에는 무력감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 담겨 있다. 장맛비가 퍼부어대는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나 물살이 쓸고 간 자리에서 ‘다른 뜻 없이’ 다시 일어나는 풀의 역동을 중점적으로 살피던 시인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원초적인 감정”(33쪽)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시선에 따르면 오늘날 바이러스가 나타나고 시베리아 동토층이 사라지고 있는 일은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추방하고 도리어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삼아서 일어난다. 살아있는 것이 어떤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는지 그것 그대로의 힘을 이해하는 일. 이는 나무와 풀과 동물들을 길들일 대상으로만 삼는 가운데 귀여운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심신의 위로만을 구하려는 최근 여러 매체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놓치고 있는 시선에 해당한다.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의 표현을 빌려 황규관 시인의 산문에서 배운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에 공감하며 말하건대 ‘우리는 아무도 귀엽지 않다.’ 자연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지속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 맺어야 할 ‘대상’일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끝내 지배하지 못할 위력을 품은 낯선 존재이기도 하므로 우리는 그이가 시퍼렇게 뜬 눈을 무척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출발한 시인의 경험은 인간의 삶 자체가 자연의 붕괴 앞에서 절대로 온전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필요와, 지금 사는 자리를 정갈하게 살피고 자기 자신의 배설물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를 설파하는 ‘시’의 자리에 대한 현재의 사유로 이어진다.
지나온 과거의 시간을 소환해서 현재 ‘서 있는 자리’를 살피고 현실에서 필요한 물음을 추리는 글들로 구성된 산문집 1부 “썩음에 대하여”의 글들은 시가 지금―자본을 앞세운 문명으로 “사물이 기호화되고, 장소가 획일화되고, 문화가 상품이 돼버린 환경”(122쪽) 혹은 모든 정보가 빅데이터화 되고 경험이 추상화되면서 인간의 내면이 황폐해지는―시대에 추구해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2부 글들의 지렛대로 역할을 한다. 시인은 2부의 여러 글에 걸쳐서 오늘날의 시가 삶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리고 “현실의 소용돌이 안으로 무책임하게 휩쓸”리고 (241쪽) 있는 건 아닌지, 해서 ‘시의 정치’라는 게 고작 ‘시인의 현실 정치 참여’로 갈음되고, 정작 시가 해내야 하는 ‘생명의 작용’을 가동시키는 활동으로부터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우려한다. 시인이 산문집의 제목으로 내세우기도 한 ‘문학이 필요한 시절’은 그러니까 “인류가 그동안 저질러왔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일들에 대한 투쟁”(125쪽)을 포함해서 구체적인 삶의 토양을 배경 삼아야만 시작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를 전폭적으로 끌어올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 이곳의 문학이 행해야 할 몫이라고 간절하게 요청하는 표현으로 읽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언어가 사유하는 법을 잃어가는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있고 그러한 상황을 요즘 시대가 형성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적언어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시적 언어’라는 것은 테크놀로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을 거부하는 언어다. 일반화되고 납작해진 언어를 벗어던진 언어이고, 상투적인 유행어를 신경질적으로 배격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정파적 입장이나 정치 이념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각자의 몸에 새긴 언어이며, 그래서 시야를 뿌옇게 가리는 미디어의 언어를 걷어내고 삶의 심장이 펄떡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언어이다.” (219쪽)
요컨대 자연이 치켜 뜬 눈을 선명하게 마주했던 어린 시절의 ‘살아있는’ 경험이 시인의 언어를 부추겼듯 “세계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는 역량”(233쪽)이 가동되는 언어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얘기다. 저주의 언어와 저급한 언어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할 테니 “우리 삶의 복판에서 태어나는 언어” “살아있는 생명의 언어”(182쪽)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길을 ‘시인’은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문학이 필요한 시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은 ‘필요’다. 이때의 ‘필요’란 “쓸모의 함정”(160쪽)에 빠지지 않고―달리 말해 ‘문학이 필요하지 않은 시절도 있다’는 차원을 해당 표현의 전제로 두지 않고―‘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기 위해 꺼내든 말이다. 자본과 물질만을 중시하는 사회에 부화뇌동하는 행태에 부쳐 시대에 발맞출 줄 아는 유연한 행위라며 칭송까지 하는 시절에, 그와 부합하고 타협하려 애쓰는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묵정밭” 한 가운데를 묵묵히 갈아 그 자리를 “대지”로 삼는 이의 목소리로부터 우리는 문학의 필요를 덤덤히 새겨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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