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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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12-16 14:54 조회4,1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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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탈성장과 커먼즈의 회복, 그리고 민주주의
―제이슨 히켈, 김현우 외 옮김, 『적을수록 풍요롭다: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황규관(시인)
경제성장이 지상 목표인 현실에서 ‘탈성장’은 아직도 허무맹랑한 이야기 취급을 받는 게 사실이다. 탈성장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는 일종의 암흑에 가깝다. 제이슨 히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창비, 2021)은 탈성장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암흑이 아니라 풍요라고 아주 설득력 있게 말하는 책이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들어가며」에서 이 책 전체의 대강을 제시한 후에 저자는 자본주의의 탄생사를 친절하게 들려주는데, 사실 이 부분은 독자들에게 교양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통증을 준다. 자본주의의 핵심 비밀은, 저자가 책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주제이기도 한데, 바로 식민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자연과 인간, 민중의 오랜 전통과 자치, 지혜와 정신을 노예화시키면서 시작됐고―저자는 심지어 대기의 식민화가 기후 위기의 직접적 계기라고까지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대기의 식민화라는 과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161쪽)―지금도 진행 중인 사태에 해당된다. 따라서 경제성장이라 함은 자본주의에 식민지를 영속적으로 허락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탈성장인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가 된 기후위기는 단지 이산화탄소 배출과 축적으로만 설명되어서는 안 되고, 경제성장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과 관계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기후위기 문제를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로 시야와 언어를 국한시키면 결국 그린뉴딜 같은 기술에 의지하는 녹색성장을 허용하게 되며, 이는 결국 기후 붕괴라는 상황을 피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증언하는 기록과 데이터는 이미 차고 넘친다. 저자는 이 기록과 데이터를 친절하게 제시하면서, 이래도 경제성장을 통해서 기후 붕괴를 피할 수 있느냐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한다. 문제는 남반구의 가난한 민중과 풍부한 자연을 파괴한 대가는 북반구의 “고소득 국가”가 가져가고 그 피해의 대부분은 남반구의 가난한 민중에게 돌아가는 현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기후변화와 관련한 사망자 역시 남반구에 편중되어 있다. 2010년 데이터에 따르면 기후 붕괴와 관련된 위기, 주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인해 약 40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사망자의 98퍼센트는 남반구에서 발생했다. 또한 사망자의 대다수인 83퍼센트는 세계에서 탄소배출량이 가장 낮은 나라에서 발생했다. 2030년까지 기후로 인한 사망자 수는 연간 53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사실상 이 모든 일이 남반구에서 일어날 것이다.(163쪽)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 것이라고 해서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고 끝날 일은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현실적인 불안을”(320쪽) 느끼기 때문이다. 전통 좌파들은 ‘자본주의 타도’ 이후 사회주의를 말하지만 정작 사회주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빈약하다. 결국 그 사회주의라는 것도 풍부한 ‘물질생활’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생태계 위기에 대한 질문을 유발하며, 이쯤 되면 우리가 처한 위기의 고갱이인 기후 문제에 무력해지고 마는 악무한을 피할 도리가 없다.
저자가 친절하게 제시하는 대안은 바로 탈성장을 통한 물질생활의 축소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말하고 나면 다시 우리는 ‘가난했던 때’를 떠올릴 것이고, 한편으로는 ‘자발적 가난’ 같은 낭만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커먼즈(commons)를 전유하면서 강제한 “인위적 희소성”을 폐기하면 사용가치는 없고 교환가치만 있는 불필요한 물자들을 없앨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인위적 희소성”이라는 것은 공공재, 즉 커먼즈를 상품화한 후 그것에 대한 접근에 가격을 매기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공공의료, 교육, 토지, 물, 대기 등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사용가치 중심으로 경제를 정상화시키면 교환가치만 존재하는 상품의 속박에서 풀려나게 된다. 커먼즈가 회복되고 불필요한 상품 생산이 줄거나 중단되면 당연히 임금노동 시간의 단축이 불가피하고, 그동안 노동 시간에 구속되어 있던 삶의 시간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이런 상태를 ‘풍요로운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책 ‘4장 좋은 삶의 비밀’과 ‘5장 포스트 자본주의 세계로 가는 길’은 이러한 저자의 영감이 논리 정연하게 잘 펼쳐져 있다. 논리는 정연한데 영감이 빛나는 것은 아무래도 저자의 상상력이 능동적인 점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사실 아포칼립스(apocalypse)의 선포로는 회심(回心)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포칼립스는 거짓 선지자의 계략이거나 최근에는 문화 상품의 좋은 재료일 뿐이다. 저자가 갖고 있는 능동적 상상력의 바탕은, 이 책의 반전에 해당되기도 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난다. 반전이라 함은 저자가 자기 심중에 물활론(animism)이 자리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물활론이 무슨 신비주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저자의 물활론은 탄탄한 철학적 소양과 과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철학적 의견 중 일부는 학문적 반론을 야기할 만도 하지만,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것은 이 책의 핵심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또 비루한 독해 방법이기도 하다. 이는 도리어 탈성장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단지 경제주의적 울타리 안에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경제성장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그로 인해 기후위기가 닥쳤다는 다소 도식적인 주장들에서 벗어나, 자본주의가 중세의 어둠이 아니라 농민들의 자치를 파괴하면서 등장했다는 역사적 통찰을 거쳐, 역사에서 어떻게 경제성장이 신의 자리에 올랐는지를 분석한 후에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저자의 탈성장론은 민주주의의 강화와 커먼즈의 회복을 통해 우리의 삶은[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한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경제와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회과학적인 언어에 갇혀 있지도 않다. 그것은 아마도 철학적 이성과 예술적 감수성이 생태경제학자인 저자의 마음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책을 쓰는 내내 저자를 지켜보았다는 오백살 된 “거대한 밤나무”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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