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호] 회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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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12-15 14:27 조회4,37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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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
대전환의 길
―『창작과비평』 주간직 떠나는 한기욱 회원을 만나다
이진혁(창비 문학출판부)
이진혁 : 한기욱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창작과비평』 편집주간으로 애를 많이 쓰셨는데 2021년 겨울호를 끝으로 그 무게를 덜게 되셨습니다. 세교 회원들께 우선 소회를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한기욱 : 1998년 겨울에 창비 편집진에 합류해서 2009년에 부주간을 2016년에 주간을 맡고, 24년간 창비에 몸담았으니 감개무량입니다. 무엇보다 주간직을 맡은 6년간 큰 사고 없이 마무리한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창비에 시련이 닥쳤을 때도 편집진과 직원분들이 단합해서 버텨내주셨기에 주간직 맡을 즈음해서는 평상심으로 임할 수 있었죠. 촛불혁명이 시작된 밝은 기운과 함께 주간직 일을 할 수 있었으니 운도 좋았습니다. 물론 어두운 면도 가시화되었지만 그런 부정적 요소도 새 길을 열어나갈 때는 오히려 성찰의 계기가 된다고 봐요.
이진혁 : 주간직을 역임하시며 가장 기억에 남는 호가 있다면 언제일지요.
한기욱 : 매호 그 나름의 애틋한 글이나 뜻깊은 특집과 좌담이 있었습니다. 특히 문학 커먼즈(공동영역)론과 돌봄의 커먼즈(공동영역)론 특집이라든지, 한국어와 동학사상 특별 좌담을 꾸린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자부합니다. 그럼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주간을 맡고 처음 발간한 창비 50주년 기념호입니다. 새 편집진이 합심하여 창비 반세기의 역사에 걸맞은 기획을 준비했고, 저 역시 「문학의 열린 길」이라는 시대론을 겸한 평론 외에 ‘책머리에’ 격인 「새 50년을 열며」라는 글까지 썼어요. 그 글의 말미에서 자본주의체제, 분단체제, 87년체제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인식과 함께 계간 『창비』가 그때그때 수행해온 정치사회적·문학적 실천을 세 차원의 체제를 바꾸는 대전환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지요. 당시는 촛불혁명 이전이라 ‘대전환’의 계기를 구체화하지 못했는데, 최근 출간된 백낙청 선생님의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에 그 요목들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호는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라는 특별좌담을 마련한 올해 가을호와 저로서는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끝까지 녹록지 않았던 올해 겨울호를 꼽아야 할 것 같아요. 동학에서 촛불혁명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개벽사상의 요체를 짚은 특별좌담은 서구 담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봅니다. 이번 겨울호는 결과적으로 어느 호 못지않게 알찬 논의를 담아냈지만 산고가 대단해서 주간직 완수라는 것이 쉽지 않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이진혁 : 주간직을 수행하시며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무엇이실지요.
한기욱 : 창비 편집위원회는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라서 주간의 재량으로만 정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요. 다만 전체적인 논의를 이끌기는 하는데, 제가 역점을 둔 것은 대전환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사회적 담론을 펼치는 동시에 좋은 창작물과 문학비평을 통해 한국문학의 활력을 키우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할까요. 문학이 실천적인 사회적 담론을 펼치는 데 방해가 되거나 따로 노는 어떤 별개의 영역이 아니죠. 말하자면, 문학은 사회적 실천들이 부문별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전환의 큰 흐름으로 모아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통합적 사유를 촉발하는 선도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이진혁 : 때맞춰 나온 평론집 『문학의 열린 길』 출간도 뜻깊습니다. ‘사유·정동·리얼리즘’이라는 부제도 인상적인데, 이번 평론집을 묶으며 어떤 생각을 가장 많이 하셨을지요.
한기욱 : 지난 10년간 발표한 글을 연달아 읽으니 세상과 문학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새롭게 발견하는 듯한 감흥과 아울러 글마다 깃든 선후배 동료의 애정 어린 논평과 열띤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첫번째 독자인 아내에게 닦이거나 칭찬받던 일도 기억나고요. ‘사유·정동·리얼리즘’은 표제로도 고려한 것인데, 최근 우리 사회와 주체들의 움직임을 좀더 적실하게 포착하고 싶은 마음에서 생각해낸 것입니다. 또한 막바지 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체제와 기후위기, 분단체제의 불확정성 등으로 엄청난 변화에 직면할 수 있는 한반도 사람들에게 문학과 세상 공부의 화두로 삼을 만하다고 봅니다.
이진혁 : 표지화를 직접 그리셨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한기욱 : 표지화는 제가 그렸지만 제가 넣어달라고 요청한 것은 아니에요. 바다의 열린 길을 따라 어린 향유고래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을 넣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딱 맞는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이 없었어요. 멜빌의 『모비 딕』에 등장하는 젖먹이를 포함한 어린 고래처럼, ‘문학의 열린 길’과 그 길을 신나게 헤쳐가는 생명력 넘치는 주체의 모습이 와닿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대략 이러한 정동이 느껴지는 고래를 넣어달라고 그려서 디자이너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그분이 몇몇 고래 표지 시안을 마련하면서 내 그림도 시안에 포함했더라고요.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고, 전문가의 ‘인정’도 받은 터라 그걸로 정했습니다.
이진혁 : 영문학자로서 또 현장 문학평론가로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해오셨습니다. 앞으로 연구하고 싶은 분야나 발표하고 싶은 글이 있다면 어떤 것일지요.
한기욱 : 주로 소설비평을 해왔는데 앞으로는 시비평도 함께해보고 싶어요. 다음번 평론집을 낸다면 시비평이 절반은 되었으면 좋겠어요. 평론집 ‘책머리에’에서 밝혔듯이 코로나19와 기후위기 시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평론을 아직 쓰지 못했고 호베르뚜 슈바르스론 이후의 장편소설론도 숙제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미국문학과 멜빌에 관한 글은 꽤 많이 썼는데, 그 글들을 밑 자료로 삼아 멜빌 문학을 새로 공부해서 저서를 낼 계획입니다. 지금 번역 중인 소설도 있지만 향후 멜빌을 비롯한 미국 고전문학과 몇몇 현대 영어권 소설도 번역해서 소개하고 싶어요. 현재 15쇄에 돌입한 『필경사 바틀비』를 잇는 미국문학단편선2도 편역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더 늘어놓으면 빈말이 될 가능성이 커지겠어요.
이진혁 : 한국문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오셨는데, 한국문학의 앞날을 전망해주신다면요?
한기욱 : 한국문학은 현재 역량도 상당하고 앞으로의 가능성도 크다고 봅니다. 특히 여성작가의 페미니즘 문학이 촛불혁명의 흐름을 타고 한국문학을 주도하는 양상입니다. 변혁적 열정과 구체적인 일상, 변화하는 관계들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포착하고 있어 최근 영미권 문학과 비교해도 수준과 호소력은 별로 밀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2000년대 이래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이 활발해지면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주목받아온 고은 황석영 등 원로 작가 외에도 해외의 유력한 문학상을 받은 신경숙이나 한강을 비롯한 여러 작가·작품도 주목을 받고 있어요. 한국문학도 세계 곳곳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의 대중예술―K팝, K필름, K드라마, K웹툰―처럼 촛불혁명의 주체적 열기와 창의적 기운을 받았으며 ‘한류’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뜨겁게 몰아치는 ‘한류’의 열기가 언어의 장벽을 뚫어 적잖은 세계인들이 한국문학을 한국어로 읽기도 하는 날이 온다면, 한국문학 붐을 기대할 만합니다. 다만 한국 대중예술이 서구 근대의 선진적인 요소들과 한국 고유의 문화적 자원을 배합하여 독창적이고 폭넓은 호소력을 끌어내는 데 반해 최근의 젊은 한국문학은 상대적으로 서구적 담론과 취향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한국문학이 서구 엘리트의 이론· 담론에 비평적 거리를 두면서 한국 고유의 문화적·사상적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한다면 세계문학에 새로운 활력이 되리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한반도발(發) 개벽사상의 여전한 의의를 논한 지난호 특별좌담은 뜻깊다고 하겠어요.
이진혁 : 한국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분석도 이어오셨습니다. 이런 지점이 세교연구소의 역할과도 연결되는데 지금 한국사회의 당면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한기욱 : 이번호 대화에서 조명하듯 불평등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자본주의체제 모순에다 분단체제로 말미암은 왜곡이 더해져서, 빈부격차나 계급적 위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자산(부동산)과 소득, 젠더, 노동, 지역, 교육 등의 요소들이 기형적으로 결합된 복합적인 문제죠. 이런 복합적인 불평등에 얼마나 적절하게 대응하느냐가 관건인데, 지난 특별좌담 때 백낙청 선생님의 “요즘에는 수평주의 자체가 새로운 신(神)이 되어버린 면이 없지 않지만 동학은 그와는 다른, 도력의 상하를 존중하는 수평적 민주주의”였다는 논평이 특별히 와닿았습니다. ‘도력의 상하를 존중하는 수평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볼 일인데, 저는 이 과정에서 도덕과 예술, 사유와 정동을 아우르는 비평적 감수성이 요긴하다고 봅니다. 수평주의를 절대화하는 순간 무엇이 나은 삶인가에 대한 비평적 질문과 감각은 실종되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죠. 다른 한편 수평적 민주주의 없이는 자본주의체제가 막바지로 갈수록 점점 더 확연해지는, 노동력의 지속적인 착취와 사회적 재생산 방식보다 노동자 상당수를 폐기처분해버리는 ‘정착식민주의’의 가혹한 방식과 자기/파괴적인 정동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진혁 : 내년 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기도 한 만큼 새 정부 출범 이후 한국사회에 주어진 당면과제를 좀더 구체화해주신다면요?
한기욱 : ‘도력의 상하를 존중하는 수평적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말씀드렸는데, 그러자면 누구나 자본주의체제의 강력한 메커니즘에 채근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어요. 앞서 거론한 불평등의 구성요소들―자산(부동산)과 소득, 젠더, 노동, 지역, 교육―을 가로지르면서 누구라도 할 수 있을 만큼의 노동을 하면서 생존의 위기에 몰리지 않고 편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어떤 강박에도 쫓기지 않고 창의적으로 살 수 있는 공간을 늘려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자면 우리의 경제를 당분간은 어느 정도 발전·지속시키는 가운데 기본소득과 기본주택, 기본의료 같은 ‘기본’적인 요소들을 도입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진혁 : 이번 평론집에서 세교연구소에 대한 특별한 감사를 표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세교연구소와 세교포럼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였을지요.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함께하고 싶으신지요.
한기욱 : 편집위원회가 당면한 계간지 기획·편집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인 토론과 학습을 하는 실무형 논의의 장이라면 세교연구소는 당장 기획과 연동되지 않더라도 여러 부문의 중요한 논제를 폭넓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너른 논의의 장이었습니다. 양자 모두 요긴한데, 다만 역할분담이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 세교포럼에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히 참여할 계획이며 좀 나중의 일이 되겠지만 제가 새롭게 연구한 것이 있다면 발표도 하고 여러 회원님들께 의견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진혁 : 개인적으로 계획하고 계신 작업들 못지않게 앞으로 세교연구소에서 선생님의 활약이 기대가 됩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2021.12.3. 창비서교사옥 편집주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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