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도 4월]회원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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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04-27 17:19 조회6,1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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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동아시아 근대와 민주주의 그리고 『녹색평론』
― 김형수 회원을 만나다
강영규
(창비 편집전문위원)
강: 김형수 회원님 안녕하세요. 2021년 1월에 우리 연구소에 합류하시고 두달이 지났습니다. 1월 총회 때 온라인 화면상으로 회원들을 처음 만나셨는데, 그날 참석 못하신 분들도 계실 테니 이번 지면을 빌려 다시 인사하시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김: 안녕하십니까. 김형수라고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권유를 받고 세교연구소의 회원으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10년 가까이 일본에서 근대사상사를 전공했습니다. 지금은 『녹색평론』의 편집과 제작에 참여하는 한편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번역도 겸하고 있습니다. 사실 대단한 사회적인 활동이라 할 순 없어서 세교연구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지만 여러 선생님들 모시고 배우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작년 6월에 안타깝게 타계하신 김종철 『녹색평론』 초대 발행인의 장남이시기도 합니다. 지금은 누이동생 김정현씨(현 발행 겸 편집인)와 함께 잡지를 꾸려나가고 계시죠. 우리 회원들 중에도 『녹색평론』 애독자가 많을 텐데요, 초대 발행인의 그늘이 워낙 큰 터라 애석해하고 그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학교일에 바빠서 사실 『녹색평론』 내부의 사정은 잘 몰랐습니다만, 『녹색평론』의 실질적인 내용을 담아내는 데는 초대 발행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이 잡지가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많이들 하셨지요. 물론 내부적으로도 그런 고민이 있었고요. 작년 추모 특집호(2020년 9-10월호)부터 발행인 자리를 이어받게 된 제 동생이 머리글에서 “『녹색평론』은 항상 공기(公器)이기를 지향해왔고, 『녹색평론』을 지탱해온 것은 발행인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고 쓴 것처럼, 가까운 분들이 해주신 말씀이나 독자들의 성원을 통해서 『녹색평론』이라는 잡지가 어느정도 그런 역할을 해왔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남은 이들이 힘을 모아서 『녹색평론』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강: 얼마전 나온 3-4월호도 잘 보고 있습니다만, 김종철 선생님이 떠난 자리를 남은 분들이 더 합심해서 채워온 덕분인지 예전 못지않은 아주 알찬 잡지라는 느낌입니다. 요즘 잡지를 만드는 편집진의 분위기나 독자들 반응은 어떤지요?
김: 독자들 가운데는 여전히 안타깝고 마음 아프다, 『녹색평론』이 사라져서는 안된다 도와야 한다 하면서 한꺼번에 십년치 정기구독을 신청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한 김종철 없는 ‘녹평’이 과연 예전의 ‘녹평’일 수 있을까 하고 회의적으로 보시는 분들도 물론 있죠. 그건 앞으로 『녹색평론』이 내용으로써 보여드려야 할 문제겠지요. 편집진 안에서는, 저희가 편집자문위원 체제여서 편집회의를 하더라도 자문위원들이 사무실에 상주하진 않고 저도 아직은 그분들과 직접 만날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 내부의 분위기까지 자세히 알진 못합니다. 그리고 앞서 나온 대로 동생 김정현이 발행인을 맡으면서 전보다 더 역할이 커졌고요. 지금 『녹색평론』에 대해선 이런 정도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강: 김형수 회원 본인도 틈틈이 『녹색평론』에 일본어글 번역을 하시는 등 힘을 보태신 줄로 압니다. 혹시 1991년 창간 무렵, 그러니까 삼십년 전이니 십대시절일 텐데, 그 당시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지요?
김: 『녹색평론』 창간 무렵에 제가 고등학생이었는데요. 당시에 저희가 살던 대구 어느 동네 뒷골목에 있는 작은 건물 2층을 매우 싸게 빌려서 사무실을 내고 시작하셨지요. 어느날 아버지가 열쇠 한개를 주시길래 그 사무실 자리에 가서 열어보니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있더군요. 아, 이제 아버지가 이런 일을 하시는구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녹색평론』 이전에도 영남대 교수로 계시면서 한살림대구 조직에 참여한다든가 1987년 6월항쟁 때는 전국 대학교수 시국성명에 가담하시는 등 사회적인 활동에 적극적이셨어요. 사실 어린시절의 저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반갑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녹색평론』에 대해서도, 저런 것이 한국사회에 필요하다는 어렴풋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런데 그 활동을 왜 꼭 우리 아버지가 해야 하는가 싶었죠. 그러다 대학 진학을 하게 되어 집을 떠났는데 어느날 학과 교수님들이 저를 찾으신다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김종철 아들이 우리 과에 들어왔다던데 한번 보려고 불렀다 하시더군요. 또 주변에서 아버지 이름을 아는 학생들도 만나게 되고, 이런저런 경험과 공부를 쌓아가면서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꼭 부정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찬성할 수도 없었던 그런 생각들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된 것 같습니다.
강: 부자간의 갈등과 화해로서는 좀 색다른 버전이네요.(웃음) 그렇게 아버지와 화해하는 한편으로, 2000년 즈음에 일본에 건너가 센다이의 토호꾸대학(東北大学)에서 근대사상사, 특히 식민지시기 조선에서도 활동했던 언론인이자 역사가, 정치가인 토꾸또미 소호오(徳富蘇峰, 1863~1957)를 연구하신 것으로 압니다. 어쩌면 그런 주제를 택하신 데 좋든 싫든 『녹색평론』 가까이에서 성장한 배경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 글쎄요, 그 관련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 의식이 없었습니다만, 소호오라는 인물에 제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메이지유신부터 2차대전 패망까지 전 생애를 통틀어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소호오가 20대 때 『장래의 일본』이라는 책을 쓰는데 이게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릅니다. 그렇게 큐우슈의 구마모또 출신이 토오꾜오의 중앙에 진출하게 되지요. 이 책은 한마디로 서구의 사상을 받아들여 일본을 서구화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후 자유민권운동이 전국적으로 팽배한 시절에는 그 사상가 중 한명으로 꼽힐 만큼 젊은 시절에는 서구사상에 경도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의 인생 후반기는 황실중심주의자, 국가팽창주의자, 제국주의자로 살았습니다. 말년에는 A급 전범의 혐의를 받고 자택에 유폐되기까지 합니다만,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벗어나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의 사상적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일본 근대가 걸어온 길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 그리고 그것이 비단 일본의 근대만이 아니라….
김: 그렇죠. 제가 일본 유학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가, 한국의 근대 그리고 그후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 어떻든 일본 근대의 영향이 있었다, 일본 근대의 역사를 공부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녹색평론』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근대성이나 근대주의, 근대에 대한 비판은 분명 김종철의 사상적 기조의 하나니까요. 근대를 되돌아보는 일이 한국이나 일본에 모두 중요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소호오는 자신을 민주주의자라고 여겼습니다만 그러면서도 천황 중심의 사고 또한 한번도 바뀌지 않았죠. 그러니 ‘민주’라는 말은 차마 못 쓰고 대신 ‘평민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냅니다만, 어쨌든 민주주의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했는지는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도 시사점이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말년의 소호오는 1950년대에 이미 평화헌법 개정을 이야기하고 나까소네 야스히로 같은 당시 젊은 정치가들과 교류하거든요. 이런 사상적 흐름이 일본의 보수우익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죠.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어린시절부터 있던 편인데, 이건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할 수 있겠네요. 군부독재 시대에 자라면서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왜 이렇게 실현하기 어려운지, 그리고 그건 이명박 박근혜 시절을 겪고 난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왜 이런 정도로밖에 구현하지 못하는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떤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강: 그러다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후꾸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나고 유학을 중단하게 되는데, ‘핵이라는 괴물’(김종철)은 『녹색평론』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개인사적으로도 공교롭다 할 수 있을 텐데, 만 10년을 넘기는 후꾸시마 사태에 대한 감회와 최근의 후속처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 제가 핵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당시 일본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후꾸시마 제1원전이 폭발하고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영상을 NHK 뉴스에서 봤을 땐 상당한 공포였어요. 제가 다니던 토호꾸대학이 센다이에 있었는데, 그때 저는 마침 토오꾜오에 나와 있었어요. 토오꾜오에서 후꾸시마까지는 직선거리로 200km가 넘으니까 당장 심각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무서웠지요. 아버지께서는 당장 서울로 돌아오라 하셨지만 저는 이미 일본에서 꽤 오래 살아온 터라 상황을 지켜보고 판단하겠다고 버텼지요. 그만큼 일본의 지진 대비에 대해 신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원전폭발 사고 소식을 전하는 뉴스 앵커를 보니까 뭐랄까 말투는 그대로인데 표정 자체가 달라져 있는 거예요. 아, 이건 정말 큰일이 났구나 하는 직감이 들어 바로 짐을 싸서 서울로 돌아왔죠. 센다이로 돌아갈 길은 막혔고, 토오꾜오를 빠져나가려는 사람은 워낙 많아서 일단 오오사까로 피신했다 3월 16일쯤 겨우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강: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군요. 그후론 어떠셨나요?
김: 그런 큰일을 겪으면서 일본이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사회가 자신의 문제를 소화해낼 능력이 약화되고 소실되어 있구나 느꼈죠. 원자력이라는 것은 사람이 건드려서는 그 뒤처리를 깔끔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고수습이 이렇게 지지부진하고 또 은폐까지 하고 있으니…. 일본사회의 구조나 메커니즘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절차를 중시하고 자기들이 만들어낸 체제나 시스템을 깨는 것에 대해 거의 병적인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런 환상, 주문에 온 나라가 걸려있는 셈이죠.
강: 후꾸시마 사태 이후 지난 10년은 대충만 헤아려도 한일관계가 나락으로 떨어진 기간이었습니다. 외교와 통상, 안보나 사법 등 여러 영역에서 유례없는 충돌과 반목이 드러났죠. 한일 양국이 ‘따로 또 같이’ 짊어진 문제를, 그것이 역사든 민주주의든 생태든, 어떻게 함께 풀어가야 할지 연구자이자 번역가, 출판인으로서 고민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단상이라도 들려주신다면요?
김: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부터 해왔던 생각 한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회의 관계 문제를 볼 때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각각이 건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났다면 한국이 건강하고 좋은, 민주적인 사회가 되도록 공부하고 토론하고 싸울 땐 싸워야 하죠.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건강한 사회와 건강한 사회가 만날 때 비로소 갈등을 해결할 길이 보일 겁니다. 두 사회의 경계에서 생활하면서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한편 일본에 살 때는 그네들이 한국을 너무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한국에 돌아와보니 우리도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한 관심이 너무 낮다는, 거의 안중에 없다고 여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식민지시대 경험을 한 세대에게 일본이 극복해야 할 콤플렉스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소비의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닐지, 그렇듯 서로를 모른 채로 삿대질하는 형국이 지속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저 역시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밑바탕을 만들어주었다는 식의 얘기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선두에 선 것은 사실이고, 한국이 해방 이후 50년간 압축적으로 발전해왔듯이 일본도 메이지유신 이래 100년간 그 과정을 겪으면서 쌓아온 나름의 저력이 있거든요. 그런 점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일본을 공부할 필요는 여전히 있다고 봅니다.
강: 올해 창간 30주년인 『녹색평론』의 편집진으로서, 그리고 일본 근대사상사 연구자이자 번역자로서 한일 시민교류에도 가교 역할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청해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김: 번역자로서는 새 역서 『농본주의를 말한다』(우네 유타카 지음)가 곧 나오고요, 『녹색평론』에도 일본 저자들의 글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제가 기획자로서 안목을 키워야 할 부분입니다. 일본의 시민운동은 지금으로선 지리멸렬한 면이 있지만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분들이 꽤 있거든요. 생태환경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연대할 만한 운동을 소개하고 싶어요. 가령 작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오다 마꼬또(小田實, 1932~2007)라는 분이 계셨는데, 제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서 그 인연으로 교류를 해왔습니다. 그분 사후에는 ‘오다 마꼬또를 읽는 모임’이 만들어져 몇년간 한국과 일본을 번갈아 방문해오다가 2018년에 그치게 됐죠. 대단한 성과를 낸 건 아니었지만 이런 활동이 모여 시민교류의 단초가 되겠다 싶어 다시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교연구소에 말단회원으로 참여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지금부터라도 의미있는 활동을 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21.3.18. 창비서교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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