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도 상반기]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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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9-28 14:12 조회7,19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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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너와 나의 말이 우리가 될 때까지
―정도상․박일환, 『남북한 청소년 말모이』(창비교육 2020)
이지영
(창비 교양출판부장)
지난겨울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만 해도 시큰둥했다. 재벌 상속녀가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북한에 불시착했다가 북한군 장교와 사랑에 빠진다는 스토리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진데다, 북한의 생활상이 제대로 그려질 리 없다는 선입견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야 전형적인 ‘로코’(로맨틱 코미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사택마을 주민들이 모여 ‘김장전투’를 벌이는 장면에서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났고, 화려한 평양의 밤거리와 활기 넘치는 장마당은 그럴듯한 정도가 아니라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게 아닌가. 기사를 찾아보니 실제로 탈북민 출신의 보조작가가 시나리오에 참여했고, 이 드라마를 본 탈북자들도 실제 북한의 모습을 가장 비슷하게 재현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나는, 아니 우리는 북한에 대해 실제로 무엇을 알고 있고, 또 무엇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기획하고 감수한 『남북한 청소년 말모이』(창비교육 2020)는 이러한 착각을 깨고 남과 북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다. 남한의 청소년들이 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북한 말을 소개하는 유튜브를 찍는다는 설정이나, 친근한 그림체의 만화와 일러스트를 첨가한 것은 마음의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실제 있을 법한 가상의 대화를 제시해 맥락을 알려주고, 남북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골고루 설명하며, 학교와 교육, 정치와 사회, 의식주, 문화와 체육, 일상생활의 순서로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도 청소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북한의 말과 생활을 다루는 청소년책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균형을 잡는 일이 어렵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남북한 청소년 말모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되 가치평가는 독자에게 맡기는 방식을 택한다. 예를 들어 북한에는 김일성 가문의 혁명 역사와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가르치는 ‘혁명력사’라는 과목이 있으며, 대학에 가려면 이 과목의 성적이 좋아야 한다고 기술한다. 또한 북한의 학교와 사회에서는 잘못을 지적하는 총화나 비판서(반성문)를 작성하는 일이 일상적인데, 이는 사회주의 체제에 맞는 인간을 길러내려는 목적이 있다고 알려주는 식이다. 청소년 독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불필요한 논란을 차단하는 최선의 조치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한자어나 영어보다는 되도록 우리말로 적으려 하고(치통/이쏘기, 스킨로션/살결물), 한(韓) 대신 고려나 조선을 쓰며(고려의사, 조선글), 복합어의 경우 출처를 살린다(달걀/닭알)는 특징 정도를 기억해두면 설사 처음 보는 단어더라도 뜻이 짐작되는 경우가 많다. 생활상이 달라졌다 해도 뿌리가 같은 말을 쓰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터다. 그런데 맥락을 봐도 도통 모르겠는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백공오리’다. 오리의 종류인가 싶지만 놀랍게도 마라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마라톤 코스 길이 42.195킬로미터를 리 단위로 바꾸면 약 105리 정도인데, 숫자 105를 북한식으로 읽으면 ‘백공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뜻하는 북한 말은 ‘얼음보숭이’가 아니라 ‘에스키모’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접하게 된 흥미로운 정보다.
몇가지 소소한 아쉬움은 남는다. 남한엔 고기가 흔해져 콩고기를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거나―전 세계적으로 비건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체육 시장이 각광받고 있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일본 말인 가라오케를 영어로 적어둔 것이 특이하다고 한 서술―karaoke는 이제 영영사전에도 등재된 단어다―은 최신의 정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남북의 정상이 아이들처럼 손을 잡고 웃으며 남북경계선을 넘던 장면이 고작 2년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꿈에서 본 듯 아득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러나 정치가 멈춘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민간의 노력마저 중단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남북한 청소년 말모이』는 언어를 매개로 남과 북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이고, 이는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의 마중물로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남한과 북한의 어휘들이 한데 모여 풍성한 겨레말로 거듭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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