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도 하반기] 포럼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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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01-04 11:41 조회7,0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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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단상
『철도원 삼대』, 그 후에 남는 물음
― 157차 세교포럼 ‘백년의 노동 : 그 나아감과 올라감 사이에서’
한영인(문학평론가)
내가 『철도원 삼대』에 대한 최초의 구상을 접한 건 황석영의 화갑을 맞아 진행된 한 대담에서였다. 최원식과 진행한 그 대담에서 황석영은 “그래서 그 다음 작품으로 생각한 것이 ‘20세기 삼부작’으로 철도원 3대 얘기였는데, 막상 하려고 보니까 지겨운 거예요.”라고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다.(황석영, 최원식 「대담 : 황석영의 삶과 문학」, 『황석영 문학의 세계』, 창비, 2003) 황석영이 앞서 거론한 작품은 『오래된 정원』과 『손님』이었는데 최초의 구상대로 『철도원 삼대』가 나왔다면 그의 ‘20세기 삼부작’은 훨씬 일찍 완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동시에 이 작품을 앞선 두 작품과의 연관 하에서 읽을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한편 관련된 언급은 그의 자서전 『수인』(2017)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나는 그 중학생 소년과 나를 매개로 영등포를 중심으로 전후 세대의 이야기에서 시작할 작정이었다. 마침 한겨레신문에서 베를린으로 기자를 보내 내게 의사를 타진해왔을 때 나는 ‘철도원 삼대’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그런 소재와 형식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세계가 격변하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본능으로 나는 세계가 전혀 다르게 변해갈 것이며 나의 서사도 변해야 할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317면) 황석영이 말한 때는 1989년이었다. 『철도원 삼대』는 무려 30년의 세월을 지나서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책의 출간 소식을 접했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책을 손에 쥐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지만 세교포럼에서의 발표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독서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할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교포럼에서의 발표는 내게도 뜻깊은 기회였지만 이 작품이 지니는 무게감을 능히 감당해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품에 대한 감상과 이해를 제외하면 그 발표문은 크게 두 개의 물음을 담고 있었다. 하나는 이 작품의 주요 골격 중 하나인 조선 공산주의 운동사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오늘날의 맥락과 어떤 접점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황석영이 강조하는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를 오늘날 젊은 작가들의 현실감각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뒤의 물음은 글의 말미에 짧게 덧붙인 정도여서 본격적인 논의를 촉발하기엔 역부족이었지만(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좋은 참조가 될 만한 의견들을 두루 말씀해주셨다.) 앞의 물음은 여전히 생각해볼 거리를 남긴다. 그 못다 파헤친 물음에 다가가기에 앞서 토론자로 나서 주신 정홍수 선생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철도원 삼대』에 대한 심도 깊은 해석이어서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적고 싶다. 정홍수 선생님께서는 황석영이 민담적 유산을 활달하게 사용함으로써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사실을 강조해주셨는데 이와 같은 인물과 서사의 활기 내지 생기는 미처 내 발표에서 요령있게 검토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발표와 지정토론이 끝난 이후 코멘트를 해주신 여러 회원들의 말씀 역시 이 텍스트를 둘러싼 나 자신의 이해를 풍요롭게 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지난 포럼을 복기하면서 새삼 묻게 되는 것은 왜 황석영은 1989년에 이 작품을 쓰지 못했을까, 그가 마음에 걸려했던 “소재와 형식”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점과 그렇다면 작품의 연재를 시작한 2019년에는 그 걸림돌이 어떻게 사라지거나 최소한 완화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독일의 통일과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목전에 둔 황석영으로서는 해방공간에서 북한을 택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역사의 승리와 연결 짓는 서사가 ‘거짓’처럼 느껴졌던 걸까. 아니면 개항과 식민지 시기, 해방공간에 이르는 시기를 상대적으로 초점화할 인물(예컨대 이진오)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이 요구되었던 걸까. 그 시공간을 뛰어넘어 2019년에 이 작품을 내놓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이를 맞춤한 “소재와 형식”으로 파악하게 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도원 삼대』를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라 각기 다른 세 가지 버전의 텍스트로 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1989년에 씌어질 뻔 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손님』을 끝낸 후,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에 씌어질 뻔 했던 것이며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가장 늦게 작성된 텍스트인 것이다. 이 실현된 텍스트를 실현되지 않은 그 두 가지 텍스트와 겹쳐 읽는 일은 새삼 생각해도 그 중요성이 긴급한데, 그 실현되지 않은 텍스트는 작가의 오랜 기억 속에 아스라한 기획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터, 기회가 주어진다면 황석영 작가에게 그 이야기를 오래 묻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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