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교칼럼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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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1-09 10:49 조회9,6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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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도
일생을 언문 선생으로 생애한 데다 한때는 출판쟁이까지 겸한 터라 일종의 직업병 비슷한 게 있다. 남의 말과 글을 교정하려는 버릇이다. 요즘은 ‘금도’가 걸린다. 정치권에서 애용되는데, 대개는 상대 당을 향해 ‘금도를 넘었다’고 논평한다. 선을 넘었다는 뜻을 딴에는 멋있게 표현한 모양일 게지만, ‘금도’의 ‘금’은 금할 ‘금(禁)’도 아니고 ‘선(線)’을 가리키는 ‘금’도 아니다. 옷깃 금(襟)에 법도 도(度), “남을 포용할 만한 너그러운 마음과 생각”을 뜻한바, 주로 ‘금도를 보였다’ 식으로 쓰이곤 했다. 예전 정계에서 여당 또는 강자가 야당 또는 약자에 양보하여 합의를 이뤘을 때 칭찬하는 관용어였다. ‘도량(度量)이 넓다’와 연관관계다. ‘밴댕이 소갈딱지’는 반대말이다. 우리 정치의 부침 속에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못나게 부활한 ‘금도를 넘었다’에 금도를 보이지 못하는 나도 문제이긴 하나, 새삼 금도가 그립다.
우리 때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양주동의 수필을 잊지 못한다. 『논어』를 구해 첫장을 읽고 크게 실망했다고 큰소리치는데 어린 마음에도 고연히 탐탁지 않았다. 후일 우전(雨田) 선생께 『논어』를 배우면서 그 까닭을 깨우쳤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익힐 ‘습’자는 깃 우(羽) 아래 흰 백(白)을 둔 건데 새끼 새가 날기 연습하노라 날갯짓을 하면 날개 밑의 털이 아직 희끗희끗한 게야.” 이때 반짝 불이 들어왔다. 습을 복습 정도로 여긴 무애(无涯)의 경박에 대한 확인보다도 습을 제대로 알게 된 기쁨이 은은했다. 학이 외부라면 습은 그 외부를 자기 내부로 감아 안는 조정과정이다. 기존의 학이 일변 폐기되면서 일변 수정되는 습을 통해 학이 진보한다는 것도 뜻깊지만, 바로 이곳이 모럴의 발생처란 점이야말로 용의 눈동자다. 이로써 습을 실천으로만 푸는 것도 복습으로 해석한 만큼이나 일면적임이 확연해진다. 한 자도 빼지 말고 한 자도 보태지 말라는 고전 번역의 원칙을 순순(諄諄)히 일러주신 선생의 가르침은 끝이 없다. 토론공동체의 종요로움을 알린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를 거쳐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이 온은 화내는 게 아니야, 노여워하는 거지.” 다시 불이 반짝 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 밖으로 터지는 화보다 안으로 타는 노여움이 훨씬 무섭다. 학이장(學而章)에서 가장 어려운 경지다. 이 지점이 무릇 공부하는 자들이 도달해야 할 마음의 끝일 터인데, 노염 타지 않는 것이 금도의 시작이다.
물론 금도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위계(位階)가 걸린다. 금도는 대개 우월한 자의 도덕이기 때문이다. 약자는 으레 권력자의 관용에만 목매야 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려니와, 약자의 금도는 부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잇는다. 사실 약자가 금도를 보이면 가뜩이나 몰리는데 더욱 불리해지지 않을까 걱정도 듣거니와, 실제 눈앞의 현실에서 다반사(茶飯事)로 목격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강자의 금도도 그냥 강자일변도가 아니다. 강자가 일시 약자가 됨으로써 금도에 이름을 상기할 때 약자가 금도라는 강자의 무기를 빌려 우이(牛耳)를 쥔다는 점에서 그냥 약세가 아닌 것이다. 요컨대 금도를 보이는 쪽이 강한 것이다.
지난달 초 인천이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한중일청년작가회의, 인천’이 개최되었다. 남북관계가 꼬이면 동아시아도 덩달아 얽히게 마련이더니 수출규제로 한일갈등은 고조되고 한중관계도 기나긴 사드(THAAD) 후유증으로 썩 좋은 게 아닌데, 와중에 오히려 중일관계는 호조로 돌아섰다고는 하지만 중일은 기본적으로 경쟁적이어서 좋은 게 좋은 게 아닌지라 한중일이 함께 하는 회의가 잘될까 하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래도 세 나라 문화장관이 인천에서 회동하여 공동선언까지 채택한 조짐도 그러려니와, 국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민제(民際, inter-civic)가 움직여야 한다는 기획위원회의 일치된 뜻을 받들어 회의가 추진되었다. 다른 회의와의 차별도 차별이지만 목하 세 나라에서 모두 청년/청년문학의 향방이 초미의 관심사인 점에 비추어 참여대상을 청년으로 제한했다. 또 이 회의가 세 나라에 한정된 것도 의식하여 동아시아니 뭐니 하는 연역적 주제를 회피하고 ‘나에게 문학을 묻는다’는 실용적/실존적 제목을 걸기로 하였다. 다행히 기획위원들의 헌신으로 촉박한 시일에도 불구하고 17인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을 섭외할 수 있었다. 드디어 개막식 날, 기조강연을 맡은 나는 약간의 불안을 금치 못했다. 고심 끝에 단 강연 제목은 ‘누구도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이는 홍콩시위 초기에 청년들이 제기한 구호 중의 하나다. 이 사태를 그냥 건너뛰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구호가 홍콩뿐만 아니라 요즘 세 나라 청년들의 기분을 대변할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채택한바, 티베트란 말만 나와도 중국 학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전설(?)들이 떠도는 판이니, 중국작가들의 반응이 내심 우려되기도 한 터다. 마침 성민엽 위원이 문제를 제기했다. 중국번역문에만 “홍콩시위에서 제기된“이란 구절을 빼는 게 어떠냐는 것이다. 자칫 중국작가들이 귀국한 뒤 어떤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데 이르러 그의 충고를 따랐다. 다행히 청중의 동요는 없었다. 오히려 후속 회의들은 유쾌하게 유익했다. 너무 솔직한 게 탈인 한국인과 달리 중국인/일본인은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데, 이 회의에 참가한 중국작가들과 일본작가들은 너무나 천연스럽게 솔직했다. 중국작가들은 홍콩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겪는 어떤 부자유를 해학적으로 털어놓으며 이웃나라 작가들과 소통했고, 일본작가들은 ‘청년’의 계보를 알린 기조에 반응하면서 즐겁게 모임에 동참했다. 남상욱 위원은 일본작가들이 어떤 긴장에도 불구하고 참석을 결정하게 된 데는 최근 일본에서 조용히 불고 있는 한국문학 바람 덕도 있다는 것이매, 과연 한국작가들은 곳곳에서 적절히 자기 몫을 다했다. 한국청년문학의 힘을 새삼 실감한다. 금도의 권력이 해체되는 진정한 금도의 시간을 시현한 ‘한중일청년작가회의, 인천’은 동아시아/동아시아문학의 미래도 머지않았다는 징조의 정수박이다.
다행히 최근 정치권은 금도를 넘었다는 논평을 내지 않는다. 이것만 해도 고맙다. 이런 교정의식이 진전되면 정치도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도 하는데, 정치에 목매지 말고 우리 청년문학을 따라 국민이 먼저 움직이는 근본을 다질 때다. 나부터, 새해에는 금도의 도덕을 먼저 학(學)하고 습(習)할 일이다.
세교연구소 고문
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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