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도 상반기] 153차 포럼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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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8-28 12:00 조회6,9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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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단상
시를 읽고 대화하는 시간에 대하여
―제153차 세교포럼 ‘백무산 시의 존재론’
황규관
(시인, 삶이보이는창 대표)
백무산 시인의 열 번째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의 허리께 즈음을 지날 때에 시인과 대담을 해줬으면 한다는 《창작과비평》 편집진의 연락을 받았다. 오랜 독자로서 망설이지 않고 그러자고 한 것은, 그 대담을 통해 시인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심 백무산의 시세계를 조금 입체적으로 읽고 그 소감을 남겨야 하지 않겠나 하는 욕심도 없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아직은 아직 불쏘시개에 불을 붙일까 말까 성냥을 들고 만지작거리는 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대담을 마치고 잡지가 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세교포럼에서 오랜만에 시 읽는 시간을 가질 텐데 발제를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을 때도 크게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거절 못 하는 나의 이 심리에 대해서 가끔 자문할 때가 있다.)
시집을 꺼내 세 번째 읽다가, 새삼 「인월장에서」에서가 눈에 들어왔고 다른 작품들이 파노라마처럼 따라서 떠올랐다. 경험을 돌아보건대, 확실히 시를 읽고 산문으로 남기는 작업은 그냥 시를 감상하는 시간과는 다른 마음자리를 요구하는 것 같다. 시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면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거나, 간혹 먼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과 산문으로 그 마음의 파편들을 이어 붙이는 일은 다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층위가 적지 않게 다른 경우에 해당되며, 요즘말로 정동의 시간과 이성의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시냇물 이쪽과 저쪽을 잇는 징검돌 놓기는 유속과 물의 깊이에 알맞은 돌덩이를 요구하는 법이다. 크고 작은 또는 둥긂과 모 등의 차이를 요구하고 거기에 내보일 것 없는 생각의 깊이까지도 모조리 고백해야 하는 작업이다. 사실 이만한 곤혹도 없다.
이 작업을 기회 삼아, 나는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에 실린 몇몇 작품을 통해 백무산 시의 바탕에 어른거리는 두 가지를 말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에로스와 존재에 대한 물음 혹은 탐색이었는데, 그의 정치시나 투쟁시가 남다른 것은, 그 바탕에 상투적인 리얼리즘 시와는 다른 무엇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우리 시인들에게는 깊은 오해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시적 인식과 산문적 인식(즉, 현실인식)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그래서 시는 산문적 인식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있는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 하지만 시적 인식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산문적 인식이라는 바탕을 상승시킨 것은 아닐까? ‘일차적’이라 했다고 해서 이 두 인식이 순서적으로 존재한다거나 산문적 인식이 시적 인식에 앞선다거나 그런 뜻을 갖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시적 인식이 산문적 인식보다 순서적으로 앞설 수 있다. 이것을 직관이라고 부르고는 하지만, 시적 인식이 작품으로 등장할 때까지의 과정에 산문적 인식이 깊게 개입한다고 말해두는 게 이 자리에서의 타협책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산문적 인식이 시의 위의와 향방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백무산 시의 바탕에서 어른거리는 에로스와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발제 발표 후 백무산 시를 에로스의 관점에서 읽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고, 나름 해석한 존재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도 그 접근 방법이 자의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에 대해 내가 말한 에로스는 성애적인 성격을 띤다기보다 무언가를 생성시키는 원리라고 답했으며, 들뢰즈적인 존재론이 아니라 차라리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이 더 어울리지 않겠냐는 지적에는 미처 답하지 못하고 말았다. 포럼이 시간에 쫓기고 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들뢰즈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공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에로스에 대해서는 다른 근거를 통해 충분히 토론할 거리가 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다만 백무산의 에로스에 과연 성애적인 면이 없느냐 하는 문제나, 꼭 에로스를 통해야만 존재에 대한 탐색이 가능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고민이다.
백무산의 존재에 대한 물음/탐색은 사실 기존의 특정 철학에 의존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다만 변명을 말하자면, 시에 나타난 존재론을 그에 걸맞게 갈무리하려면 읽는 이의 존재론이 준비되지 않으면 난망한 일이며, 그게 미처 준비되지 못했다면 이미 제출된 철학적 입장을 참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특정 철학적 입장에 완전히 의탁한 시 읽기는 도리어 시를 형해화시킬 수 있다. 아무튼 발제문의 전반부는 들뢰즈의 존재론에 기댄 게 사실이고, 「소를 끌고」를 중심으로 살핀 후반부는 어설픈 하이데거 독서를 참조했다. 하지만, 그간 읽어온 백무산의 시를 떠올려봤을 때, 당연히 작품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생각을 더 다듬어야 할 필요성은 느꼈다. 생각을 다듬어본들 어디까지 가능할지는 둘째 치고 대화나 토론이 없다면 스스로의 우물 안에서 밤하늘이나 바라보기 십상인데, 발제와 토론을 통해 어줍지 않은 사고의 수심을 확인한 것 자체가 공부가 된 것 같다.
문학 자체가 대화적인 양식이기도 하나, 작품 읽기에도 대화와 토론이 마음자리와 생각을 바꿔주는구나, 하는 소득을 새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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