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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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2-07-13 11:55 조회3,32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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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수영 ‘이후’를 살아야 하는 운명과 사명을 생각하며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한겨레출판, 2022)
황규관(시인)
한국 근대시사에서 김수영만큼 이후 세대들에게 관심을 받고 연구가 행해진 시인을 알지 못 한다. 이는 김수영이 누리는 문학사적 영광이고 지복으로 보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김수영 이후 세대의 축복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 스스로 「현대식 교량」에서 말한 것처럼,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이 한국 근대시사에서 어떤 ‘다리’가 된 것일까? 최소한 외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세대들의 김수영에 대한 사랑은 김수영이 상상하고 꿈꿨던 역사적 시간이 (일부 실현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유예 중이어서 나타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2021년, 김수영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겨레>가 기획·연재한 글을 모아놓은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한겨레출판, 2022)는 이미 연재 시작부터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한 시인에게 이런 파격적인 대접이 또 있었던가. 아마 난해한 김수영을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수영의 시가 독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김수영의 시 자체가 어떠한 일반주의도 거부하기 때문에 갖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출간된 김수영에 대한 책들 중 상대적으로 독자들이 접하기 편안한 책인 것은 사실이다.
일단 김수영의 문학에서 핵심적인 키워드 26가지를 뽑아 접근한 것과 논문 형식이 아닌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김수영을 읽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키워드 중심으로 작품을 읽어주면서도 김수영의 연대기적 시간에 최대한 충실한 편집이라는 점이다. 최근에 접한 몇몇 김수영 시선집들은 이런 연대기적 순서를 파괴하고는 하는데, 편집상의 새로움일지는 몰라도 일반 독자들에게 김수영의 시를 더 난해하게 소개할 개연성이 있다. 왜냐면, 김수영의 시는 그의 삶과 그가 산 역사를 겹쳐 읽어야 이해되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말한 대로 “김수영의 빛과 그늘을 모두 다루는 것이었음에도” “그늘의 몫이 부족해 보이는 것”(7면)도 사실인데, 아마도 향후 김수영 연구와 읽기는 바로 이 “그늘”을 향한 고투여야 할 것이다. 나름 “그늘”을 다룬 글은 맹문재와 노혜경의 것이고 그 키워드는 각각 ‘여편네’와 ‘여혐’이다. 하지만 맹문재의 글은 어딘지 자의적인 느낌을 주고 노혜경의 글은 김수영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진전됐음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분 다 유족인 김현경의 말을 차용하고 있다. 최근에 느끼는 것이지만 유족인 김현경과 김수명의 발언이 연구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점도 없지 않다. 만일 김수영에게 ‘여편네’와 ‘여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늘”이 실제 있다면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거나 적극 옹호되거나 역사적 관점이 결여된 비난으로 귀결돼서는 안 될 노릇이다. 노혜경의 말대로 그것은 김수영이 자신이 산 시대와 함께 감당해야 할 숙명이기 때문이다.(213면)
그런데 이 주제가 과연 김수영의 진짜 “그늘”인지는 잘 모르겠다. 도리어 김수영의 “그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수영이 말한 참여시의 의미를 해석한 신형철의 글에서 의도치 않게 드러나는 것 같다. 신형철은 ‘온몸의 시학’을 해명하면서 김수영의 산문을 검토하고 있는데, 이 때 불려 나온 증거물은 「참여시의 정리」와 「시여, 침을 뱉어라」이다. 신형철은 김수영의 산문에 등장하는 무의식과 의식, 온몸과 그림자, 이념과 참여의식이 의미가 비슷한 개념쌍이라고 지적한다. 신형철의 결론은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은 “무의식적 참여시‘라고 부를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이상 231) 결론에 이르는 논리적 과정은 날카롭지만 결론을 “무의식적 참여시”라고 호칭하는 것은 김수영이 말한 참여시를 ’자유주의적‘으로 받아들일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산문 여러 곳에서 김수영은 그것을 부정하고 비판하기까지 한다.
신형철의 글이 의도치 않게 김수영의 “그늘”을 드러내는 것은 신형철의 결론 때문이 아니다. 김수영 자신이 자기 시의 비밀은 번역에 있다고 말한 만큼, 그의 생업 겸 공부로서의 번역은 고봉준의 말대로 “시의 변화를 이끈 자극들”(196면)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수영은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에서 라이오넬 트릴링의 논문 「쾌락의 운명」을 언급하며 자신의 현대시가 출발한 지점을 트릴링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기도 한다. 문제는 이 번역 행위가 그에게 끼친 “자극들”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느냐는 점이다. 김수영이 번역을 통해 접한 프로이트적인 무의식 개념은 김수영의 후기시에 난해성을 더 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것은 김수영 개인의 정신과 김수영이 창작한 작품의 문제로만 볼 수도 있고, 그것마저도 김수영의 성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시가 점점 더 심화되는 자본주의와 또 그만큼 혹독해지는 민중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 장애가 되었을 수도 있다. 김수영에게 제대로 된 민중시를 쓰지 못했다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5·16쿠데타 이후 김수영의 역사 인식은 단순하게 전통으로의 회귀라고 못 박을 수 없다. 역사 인식의 진전은 「반달」,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을 거쳐 「사랑의 변주곡」에 이르렀다. 김수이의 말마따나 「사랑의 변주곡」에서는 ““사랑에 미쳐 날뛸” 미래를 이미 품고 있는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형태로 ‘아들’에게”(255면) 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진전과 더불어 김수영이 꿈꾼 것을 “영구 혁명”(김명인, 156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새로운 꿈과 비전을 향한 그의 벅차오름과 상상력을 ‘혁명’에 가두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유성호의 지적처럼 「풀」에서 “모든 사물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응과 친화의 관계에서 서로를 존재하게 한다는 것을”(262면) 보여주기도 한다. 「풀」에서 이것을 읽어내려면 개인적으로 「여름밤」도 참조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기는 한데, 아무튼 새로운 꿈과 비전에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과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는 깊이 따져볼 문제이다.
이 의심을 밑받침하기 위한 다른 경로도 있다. 김수영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저작에서 분명하게 언급된 동학을 비켜 갔다. 「거대한 뿌리」에서 과잉된 감정이 보이는 것도 중요한 동학 사건을 숙고하지 않고 자기 경험에만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미역국」에서 “퇴계”와 “정다산”을 호출한다. 「미역국」과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은 1965년 작이며 「거대한 뿌리」는 1964년 작이다. 그 즈음 김수영의 어떤 번역은 그의 역사 인식의 진전을 가로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이런 맥락에서 저 무의식 개념을 함께 검토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동학을 왜 몰랐을까 하는 아쉬움의 토로가 아니며 또 그의 역사 인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의미도 아니다. 김수영 이후를 제대로 살자는 다음 세대로서의 비평적 개입이다. 김수영 ‘이후’가 하는 일이 단순하게 훈고학적 연구에 머문다면 김수영은 도리어 박제화될 것이다. ‘이후’ 세대는 그 나름의 역사적 과업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김수영이 이 과업에 보탬이 되거나 도약대가 될 수 있는지도 함께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김수영이 산 “잘못된 시간의/그릇된 명상”을 피하는 길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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