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도 상반기] 학술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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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0-09-03 15:46 조회7,347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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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동향
세교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은 국내외 학술동향을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학회 참관기나 동향소개 등 최근 학술계 이슈와 관련해 회원들의 원고를 기다립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이번 호에는 영미권 환경인문학 동향과 관련한 유희석 회원의 글을 게재합니다. |
기후재난, 환경인문학, 기후소설(Cli-Fi)
유희석
(전남대 교수)
기후재난에 지식인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대학인이 아니더라도 양식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져보았을 법한 물음이다. 그만큼 어디를 막론하고 파국적인 기후변화에 따라 생태환경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높아졌다는 뜻이겠다. 역대급 장마가 지나간 올 여름, 한국의 일반시민들도 마침내 기별을 받은 것 같다.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는 움직임이 운동의 형태로 더 치열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녹색평론』같은 잡지가 그간 저변을 꾸준히 넓혀 왔지만 10년이 가깝도록 녹색당이 국회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첫 문장의 물음에 딱 떠오르는 답변 가운데 하나가 환경인문학이다. 영미의 인문학계가 환경인문학을 들고 나온 것은 201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쪽 학계도 기별이 늦기는 매한가지였던 셈이다. 가령 듀크 대학 출판부에서 학술지 Environmental Humanities를 내기 시작한 것이 2012년이고 네브라스카 대학은 2014년부터 Resilience: A Journal for the Environmental Humanities를 역시‘온/오프’로 발간하고 있는 중이다. MIT 대학출판부에서 The environmental humanities : a critical introduction이라는 개설서를 소개한 것이 2017년 일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관련 주제로 수많은 저서와 논문이 출간된 상태다.
기후재난을 초래한 일체의 인간 활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환경인문학의 정의를 둘러싸고 학계의 논의가 분분하다. 이론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면 학자들이 민중의 실감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환경인문학은 성격상 실천성을 강하게 담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2020년에 인구 1만 6천의 인디언 보호구역 Standing Rock을 관통하는 송유관 다코타 액세스 파이프라인의 폐쇄 판결을 이끌어낸 풀뿌리운동에 대한 환경인문학자들의 개입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환경인문학은 기존의 칸막이형 연구방식과 근원적으로 대립된다. 환경이라는 범주 자체에 인간과 동식물을 비롯한 일체의 생령이 포함될뿐더러, 석유중독문화(petroculture)에 대한 정확하고도 엄밀한 비판에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의 협업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협업과는 다른 맥락에서 환경인문학과 무관할 수 없는 문학의 장르도 있다. 2007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신조어 Cli-Fi(Climate Fiction)가 그것이다. SF와 Cli-Fi의 관계를 두고 문학연구자들 사이에도 여러 논의가 있지만 후자가 우리시대의 ‘참여문학’이라 할 만한 요소들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후변화의 영향이 인간 활동 영역의 모든 곳에 미치는 터라, Cli-Fi가 다룰 수 있는 주제도 그에 상응할 것이다. 바야흐로 학계의 일각에서 기후사실주의(Climate Realism)를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뜨거워지는 세계가 제기한 인식론적, 미학적, 존재론적 물음을 수용하는 재현의 형식들과 그런 형식의 한계를 직핍”하는 탐구의 자세를 가리킨다고 한다. 담론의 영역에서도 기후변화에 대해 다각도로 학문적 성찰이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
길게 소개할 수는 없지만 존 랜체스터(John Lanchester)의『벽』(The Wall, 2019)은 근년의 기후소설 가운데 기후리얼리즘이랄 만한 단면을 보여준다. ‘더 월’이라는 제목으로 최근에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는데, 해수면 상승으로 1만 킬로미터의 콘크리트 벽을 해안선을 따라 세우고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의 일상이 무서우리만치 냉정하고 핍진하게 그려진다. 영국으로 짐작되는 그곳의 상황이 앞으로 한반도에서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이 현 상태대로 지속된다면 ‘뉴 노멀’에 대한 힘겨운 적응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의 종말을 맞는 비관주의만이 유일하게 정직하고 현실주의적인 태도일 거라는 환경인문학자들의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시간의 비약이 있을 수 없는 인간은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어서 아직 그런 비관주의에 이런저런 여지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물음은 더 절박하다. 기후재난에 지식인들은 어떻게 맞서야만 하고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가,□
댓글목록
유희석님의 댓글
유희석 작성일
급하게 청탁받고 후다닥 쓴 졸문이라 오탈자가 여럿 있었는데, 아직도 남아 있군요.
읽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바로 잡습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의 협업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의 협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 글에는 해당 안 됩니다만 앞으로 이런 식의 학술동향은 조금 더 공들여서 회원들에게
제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무국님의 댓글
사무국 작성일유희석 선생님 급한 청탁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공부를 했는데 오탈자를 충분히 확인 못한 점 송구합니다. 지적받은 후 오탈자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미 댓글이 달린 글은 수정이 불가능하다니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