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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도 하반기]학술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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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1-01-04 11:42 조회6,0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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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동향

 

 

한반도에 초대된 ‘반둥회의’

     

 

백지운(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지난달(11.19~20) 다소 특별한 학술회의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신한대학교 탈분단경계문화연구원이 주최한 ‘반둥회의를 통해 본 한반도 문제: 아시아적 관점과 탈분단의 과제’라는 주제의 회의였다. 냉전시기 비서구 국가들이 모여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넘어설 제3의 길을 모색했던 반둥회의의 의미를 반추함으로써, 오늘의 한반도 문제를 보는 전환적 시각을 찾아보자는 취지였다.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제1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열렸던 1955년 4월, 아시아는 냉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열전(熱戰)의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한반도에서 양안(兩岸) 해협을 지나 인도차이나 반도로 확산되는 전화(戰禍)의 연쇄는 미소(美蘇)로 양분된 두 세계 중 하나를 택한다는 것은 곧 자멸의 길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반둥회의는 비서구 국가들이 양자택일이라는 주어진 선택지를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로부터 65년, 여전히 강대국 중심의 사고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이 좌절된 기획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채 잊혀져 갔다. 특히, 지구적 탈냉전이 도래한 지 삽십년이 된 지금까지도 강대국들의 날선 각축장으로서 긴장이 팽팽한 한반도에서 반둥회의는 더더욱 먼 나라의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북한학 및 정치학자들이 기획한 학술회의에 반둥회의가 다뤄진 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반둥회의의 유산으로부터 한반도의 탈식민·탈패권·탈분단의 길을 탐색하는 구갑우(북한대학원대학)의 발표로 시작하여 인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대만,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지에서 온라인으로 참가한 학자들은 정치·경제·문학예술 등 각자가 선 자리에서 반둥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점선들을 더듬어 짚어나갔다. 물론, 한 차례의 회의로 학술계의 어떤 동향이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섣부를 것이다. 그러나 65년 전의 사건이 한반도의 어느 장소로 소환되기까지에는 어떤 저변의 흐름에 의한 추동이 작용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글로벌 냉전 연구의 패러다임의 변화는 진작부터 한반도 문제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해온 터였다. 얼마 전 국역본으로 소개된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 Westad)의 『냉전의 지구사』를 비롯하여 최근 냉전 연구의 눈에 띄는 변화는 제3세계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한 종래의 냉전 연구에서 제3세계가 강대국 싸움에 좌지우지되는 무기력한 희생양으로 그려졌다면, 최근의 연구는 제3세계를 미국과 소련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적극적 행위자로 부각함으로써 냉전의 전체상을 재구성한다. 이처럼 제3세계의 역할이 강조되는 이유는 동서대립을 축으로 하는 기존의 냉전담론으로는 비서구 지역의 복잡한 역사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이다. 역사학자 홍석률은, 미소냉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종종 그와 어긋나는 한반도 냉전의 ‘예외성’은 동서대립과 남북대립(탈식민문제)이 착종하는 제3세계 현실에서 본다면 오히려 글로벌 냉전의 본질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말하자면,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현실정치의 틀로는 한반도 분단과 냉전의 실상을 온전히 분석하지 못함은 물론 그 극복의 길을 찾기도 난망하다는 문제의식이야말로 북한 연구의 영역에서까지 반둥회의를 불러들이게 된 배경이 아닐까.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약소국들이 모여 새로운 국제질서나 규범을 만든다는 것은 한갓 몽상에 불과하겠지만, 최근의 연구들이 말하듯 냉전시기에도 제3세계는 강대국의 파워게임에 종속되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미중간의 패권다툼이 고조되는 가운데 ‘신냉전’이라는 말까지 회자되고 있지만, 과거처럼 강대국이 세상을 양분하는 상황이 재연되기는 쉽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일대일로’, ‘인도-태평양 전략,’ RCEP 등 거대 지역전략들이 합을 겨루며 지정(경)학적 새판을 짜는 가운데,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중소국들의 역할은 전에 없이 중요해졌다.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에 머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규범과 질서, 가치를 창조하는 데까지 눈을 높여야 하는바, 이를 위해서는 더 큰 철학과 비전에 기반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맺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65년 전 힘없는 신생국들이 모여 큰 꿈을 도모했던 실험장 반둥을, 당시 초대받지 못했던 한국이 손님으로 맞아들이게 된 맥락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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