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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조형근의 '지금, 이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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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3-05 14:35 조회6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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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책방에서 세상을 고민하는 동네 사회학자.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키워드로 읽는 불평등 사회’, ‘우리 안의 친일’ 등을 썼다.


살다 보니 어쩌다 내 이름이 지면에 실린다. 그 참에 불의를 고발하기도 하고, 세상이 나아갈 길에 대해 목소리 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헛헛해지곤 한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가 있다. 구원, 계몽, 해방을 약속하던 아름답고 큰 서사들이, 종교와 신화와 역사가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며 스스로 붕괴하는 시절이다. 지식인의 말이 뿌리내릴 토대도 허물어지고 있다.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은 우익의 신앙과 좌익의 신념이 ‘역사의 악령’이 되어 약한 자들의 삶을 파괴하는 인도의 현실을 증언한다. 거기서도 사랑은, 아니 거기라서 사랑은 더 뜨겁다. 불가촉천민 출신 남성 노동자 벨루타와, 이혼 후 쌍둥이 남매를 키우는 공장주의 여동생 암무가 열네번의 밤 동안 금지된 사랑을 나눈다. 엄격한 카스트제도, 제국주의의 유산, 성차별 관습처럼 거대한 것들이 삶을 짓누를 때, 벨루타가 참가하는 공산당조차 그를 이용하고 버릴 때, 아, 그 가여운 순간들마다 그들의 사랑은 얼마나 작고 어리석고 사랑스럽던지. 서로의 엉덩이에 난 개미 물린 자국을 보고 웃고, 잎사귀 끝에서 미끄러지는 어설픈 애벌레에, 혼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뒤집어진 딱정벌레에 웃고. 그리고 처연한 최후.


큰 이야기 대신 작은 것 속으로, 역사 없는 찰나 속으로 침잠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작은 것 속에 신이 깃든다’는 작가의 말이 내게는 ‘작은 것 속에 깃들지 못한다면 신일 수 없다’라고 들린다. 누군가 자유롭지 않다면,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 더 낮아서 더 아픈 고발이다. 내 이야기가 헛헛하다면 그건 내가 삶의 작은 것 속에 깃들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지식인인 체하며 살 앞으로의 날들 중에도, 이들이 나눈 지상의 마지막 밤들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다.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 2025년 2월 20일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803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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