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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죽어가는 것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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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6-04 13:56 조회2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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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에 짬을 내어 제주도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의 자연을 느낀 귀한 시간이었다. 첫날 숙소인 게스트하우스는 비수기라서인지 묵는 이가 나와 30대 초의 청년뿐이었다. 저녁 식사 때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면서 나름 고민도 가진 ‘건실한’ 청년인 듯했다. 


아직 해외여행 경험이 없다고 해서 화제가 해외여행으로 이어졌다. 이웃 나라부터 시작해 보라며 일본 여행을 추천하자 좋아했다. 중국도 다양해서 좋은 여행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더니 분위기가 돌변했다. 중국처럼 나쁜 나라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꼰대처럼 보일까봐 부러 그의 견해에 조금 동의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중국도 있다고.


하지만 중국은 큰 나라라 전혀 다른 중국도 있다고. 그리고 내 경험을 말했다. 동북지방 다롄에서 겪은 감동적인 친절, 서부 윈난성 곳곳에서 접한 따뜻한 만남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소용없었다. 청년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다. 중국인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라도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런 적은 없지만 중국인이 ‘모두’(!) 나쁜 사람인 건 분명하다고 했다. 더 이상 대화가 어려웠다.


한 명의 사례이긴 해도 그 단호함이 강렬하게 남았다. 한국 사람도 다양한데, 14억 명 중에 어떻게 좋은 사람이 없겠느냐고 말해봐도 한결같았다. 좋은 중국인은 한 명도 있을 수 없다는 믿음이 확고했다. 선한 얼굴에서 증오심이 거침없었다. 한국인, 특히 청년세대의 혐중 정서가 심각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접하고 나니 아득해졌다.


문득 1980년대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군부독재 시절, 대학교 2학년 남학생은 전방 군부대에 강제 입소하여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입소일이 다가올수록 반대 집회와 시위가 격렬해졌다.


어느 날의 집회였다. 한 2학년 남학생이 의견을 발표했다. 자신은 ‘미제의 용병 교육’인 전방 입소를 반대하지만, 그런 미국관에 동의하지 않는 보통 학생들은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해 보자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갑자기 청중 한 명이 그에게 달려들어 이단 옆차기를 했고, 발언하던 학생은 크게 다쳤다. 감히 반미 투쟁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게 폭력의 이유였다.


반미 노선의 어떤 선배가 한 말도 생각난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제국주의의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좋은 미국인이란 있을 수 없다고. 그 시절 반미 청년의 결연한 표정 위에 좋은 중국인은 있을 수 없다는 지금 젊은이의 모습이 겹친다.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와 얽힌 복잡하고 비극적인 역사를 감안하면 옳고 그름과는 별개로 반미도, 혐중도 근거가 없지는 않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혐중이나 반미의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국가와 그 구성원인 국민, 인민, 시민, 개인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 태도에 관한 문제다. 


이런 동일시의 전형이 ‘국민성론’일 것이다. 국민국가의 다양한 구성원이 동일한 심리적·행태적 특성을 공유한다는 이 폭력적 인식론은 본디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차별적 인식 앞에 당혹해하던 1920년대 일본에서 발생했다. 일본 국민성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열등한 타자로 등장한 것이 중국인, 조선인이었다. ‘엽전들은 안 된다’거나 ‘조선 놈들은 패야 한다’던 우리 어릴 적 어르신들의 상투어구가 여기서 나왔다.


그 집단적 자학의 언어가 어느 순간 집단적 혐오와 증오, 경멸의 언어로 변했다. ‘미국 놈’, ‘중국 놈’은 물론, ‘동남아 애들’처럼 여러 나라를 싸잡아 비하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어디서도 국가와 그 구성원은 구별되지 않는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군의 참전이 공식 확인됐다. 북한군 참전이 우크라이나의 거짓 선동이라던 일각의 주장은 오류로 판명됐다. 그에 대해 논쟁하려는 건 아니다. 전쟁을 둘러싼 이편저편의 말 상당수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는…”처럼 국가를 단일한 유기체로 전제했다. ‘국익’이나 ‘안보’ 같은 국가주의 프레임이 성찰 없이 횡행했다.


탄압을 무릅쓰고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인이 있음을, 러시아를 모국으로 여기는 우크라이나인도 꽤 있음을 인식하려는 노력은 곧잘 묻혔다. 사실의 해상도를 높이고 복잡한 콘트라스트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종종 실패했다. 물론 국가는 힘도, 실체도 뚜렷하다. 다만 죽어가는 것이 국가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조형근 사회학자 


교수신문 2025년 5월 6일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3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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