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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압도적 승리는 21세기 '체공녀'를 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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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6-04 13:56 조회2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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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진압이라는 긴급한 당위가 공론장을 뒤덮었다. 선거 때나마 조명받던 오늘의 고통과 내일의 꿈에 대한 논쟁이 실종됐다. 지금은 불평등 완화나 차별 철폐의 요구를, 성장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비판을 꺼낼 때가 아니라는 경고가 준엄하다. 집권 이후를 따질 때가 아니라는 포괄적 위임, 신탁의 논리가 횡행한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다. 지울 수 없는 목소리들이 있다.


2019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좌파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는 평생 계급불평등 연구에 매진했다. 실현 가능한 대안을 구상하는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생의 마지막까지 수행했다. 68혁명이 한창이던 1968년에는 ‘체스 게임’이라는 애니메이션도 만들었다. 뒷줄에 선 왕과 귀족들이 앞줄의 졸들을 조종한다. 싸움에 이용되고 버려지던 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고 함께 흥겹게 춤춘다. 이윽고 새판이 시작된다. 이제 뒷줄에 선 졸들이 왕과 귀족을 앞세운다. 앞줄과 뒷줄은 바뀌었지만 게임의 규칙은 바뀌지 않았다. 불평등한 세상 그대로다.


반란조차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한꺼번의 반란 대신 조금씩의 선거를 치른다. 그렇게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 된다. 적대하는 정당과 지지자들 사이에 논쟁이 달아오르고, 온갖 이익단체와 사회단체가 요구를 내걸며, 언론은 여론을 달군다. 무시받던 약자도 이때만큼은 조금 관심을 받는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키겠다”며 약속이 난무한다. 한표가 아쉬우니 벌어지는 일이다.


그 약속 중 상당수는 공수표가 된다. 심지어 후퇴하기도 한다. 열광만큼 냉소가 넘치는 이유다. 장자크 루소는 영국인은 선거 때만 자유인이 되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간다고 일갈했다. 대표자에게 맡기는 위임 민주주의는 필경 무조건적 신탁으로 퇴보하게 되니, 직접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취지다. 반면 독재자들은 선거에 대한 냉소를 이용하면서 민주주의 대신 독재자를 따르라고 선동한다. 거짓 약속이라며 선거에 냉소할 수도 없고, 거짓인 줄 알면서 열광할 수도 없다. 그 좁은, 없을 것 같은 틈 사이에서 길을 내야 한다. 위임 민주주의의 딜레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런 딜레마를 찾기 어렵다. 약속 따위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상상 이상의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는 국민의힘은 약속 여부를 따질 계제가 아니다. 진지하게 해산을 고민해야 한다. 이명박의 ‘747 성장론’을 빼닮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345 성장론’이나 10대 공약도 별반 논란이 못 된다.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과 사회단체 등 진보진영이 ‘민주노동당’으로 모여 후보를 냈지만 관심을 끌지 못한다. 내란 진압이라는 긴급한 당위가 공론장을 뒤덮었다. 선거 때나마 조명받던 오늘의 고통과 내일의 꿈에 대한 논쟁이 실종됐다. 지금은 불평등 완화나 차별 철폐의 요구를, 성장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비판을 꺼낼 때가 아니라는 경고가 준엄하다. 집권 이후를 따질 때가 아니라는 포괄적 위임, 신탁의 논리가 횡행한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다. 지울 수 없는 목소리들이 있다. 트랙터를 몰고 상경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전봉준투쟁단은 결연했다. “사람이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1987년 이후 역대 모든 정권이 농업, 농민을 무시하고 파괴했다”며 대선 후보들을 직접 만나 확고한 대답을 듣겠다는 각오다. 경찰이 서울 진입을 원천 봉쇄했지만, 곧 다시 상경할 것이다.


구미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 노동자 박정혜는 공장 옥상에서 농성 중이다. 5월21일이면 500일이 된다. 함께하던 소현숙은 얼마 전 건강 악화로 내려갔다. 이 회사는 일본 기업 닛토덴코가 외국인투자지역에 설립한 자회사로서 토지 무상임대, 법인세 감면 등 혜택을 받으며 수백억원의 이익을 내왔다. 2022년 화재가 발생하자 법인 청산을 결정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다른 자회사로 고용승계를 요구했고, 박정혜와 소현숙이 불탄 공장의 옥상에 올랐다.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 고진수가,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의 김형수가, 홈플러스 노동자들이,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공에서, 지상에서 단식하고 싸우며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고 있다. 명태균과 김건희의 문자에 시시콜콜 열광하는 주류 언론이 이들의 이야기에는 100분의 1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거대 정당들도 모른 체한다. 한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한남동에서, 남태령에서, 전국 곳곳에서 내란 진압에 앞장섰던 청년 여성들은 선거 국면이 되자 더불어민주당 주위에서 금지어가 됐다. 성평등 의제 자체가 금기라는 말도 들린다. “잡은 물고기에겐 먹이를 주지 않는다”더니 인심이 무섭다. 심지어 여성 혐오 발언까지 들린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2.5배 이상 높아서 최고다. 남녀노소 모두 힘들다. 그중 청년 여성의 자살률 증가가 두드러진다. 높아진 기대와 차별의 현실 사이 간극이 아찔하다. 그 절박함에 응원봉 들고 광장에 섰을 것이다. 잡은 물고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이들이 아니다.


사회대개혁의 열망이 추운 광장을 메웠다. 농민도, 불안정 노동자도, 청년 여성도, 장애인도, 성소수자도, 이주민도, 당신과 우리도 좀 더 나은 삶을 외쳤다. 그 목소리에 힘입어 선거가 이뤄지자 정치는 광장에 없던 기득권자들 몫을 챙겨주는 데 몰두하고 있다. 압도적 승리를 위해 우경화해야 한단다. 압도적으로 승리한 이명박 정권이 안정적이었던가? 한때 지지율이 90%에 이르던 김영삼 정권의 말로는 어땠나? 사람의 삶이 사라지면 지지율은 신기루일 뿐이다.


1931년 5월29일, 평양의 원평고무공장에서 임금 삭감에 맞서 단식 투쟁을 하던 여성 노동자 49명이 새벽에 해고됐다. 쫓겨난 노동자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였다. “우리 49명 파업단의 임금 감하”만이 아니라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임금 감하”를 막기 위해서 싸운다고 외쳤다. 해고 노동자가 절반으로 줄었다. 체포된 강주룡은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내 죽었다. 젊디젊은 나이, 31살이었다. 공중에 머물렀다며 세상이 체공녀라고 불렀다. 노동자 고공 농성의 효시다.


남화숙의 책 ‘체공녀 연대기’는 1931년 강주룡부터 2011년 한진중공업의 용접공 출신 해고 노동자 김진숙까지 80년에 걸친 여성 노동자 고공농성 투쟁기를 다룬다. 김진숙의 309일 최장 농성 기록이 박정혜와 소현숙에 의해 속절없이 깨졌다. 투쟁기도 80년을 훌쩍 넘어 94년을 맞았다. 곧 100년을 넘길 기세다. “아직은 이르다”는 말만 계속하다가는 200년도 될 것 같다. 슬프고 아득하다. 하지만 나아가야 한다.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 2025년 5월 14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973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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