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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학살 시대의 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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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10-24 10:25 조회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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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바탕에는 ‘근대적 합리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나치 시절 근대적 합리성의 비근한 예로 관료제를 들었는데 사실 관료제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미 시작됐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임스 R 베니거는 19세기의 관료제는 정보의 프로세싱을 ‘줄이면서(preprocessing)’ 통치의 합리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근대적 합리화는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통치의 효율을 위해 줄이고 덜어내는 것이라 해석해도 무방하다.


서구, 대량학살에 침묵으로 동조


베니거가 근대 관료제의 특징으로 의도적인 ‘줄임’을 말할 때 큰 의미를 둔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거론되다 1970년대에 마이크로프로세싱 기술을 통해 도약하게 된 정보사회의 본질을 제어(control)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기 위한 정지 작업을 하다가 흘린 말이다. 하지만 근대 관료제가 ‘줄임’을 통해 국가와 사회의 합리성을 추구했다는 무의식적 지적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줄임)의 바탕에 근대적 합리성이 있다고 본 바우만과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 두 미치광이인 네타냐후·트럼프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네타냐후와 트럼프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아니다. 네타냐후는 1996년에 처음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한 것은 2009년부터다. 트럼프는 2017년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가 다시 2025년 1월부터 제47대 대통령을 역임 중이다. 두 인물이 동시에 역사에 등장하게 된 사태는 아마도 21세기 최악의 사건에 해당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트럼프 재임 기간인 2019년에 ‘타임’은 네타냐후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한 바 있는데, 여기서 ‘영향력’이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를 떠나 네타냐후와 미국 간의 관계를 새삼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 네타냐후는 미국 유학파이기도 하다.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학살하고 있는 현실에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무기력하거나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현실을 접하면서, 현재 인류에 밀어닥친 큰 위기를 실감할 수밖에 없는데 팔레스타인 민중의 대량학살이,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지, 큰 혼돈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혼돈과 분노와 슬픔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미 20세기 초에 있었던 여러 대량학살들, 특히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에 서구의 정신이 붕괴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같은 행위를 서구 사회가 반복한다는 것이며, 더더욱 인간의 정신에 먹칠을 하는 것은 피해자가 전례 없는 가해자가 된 현실이다. 나치는 관련 자료를 은폐하거나 지우기라도 했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은 그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트럼프는 전쟁이 끝나면 가자지구를 개발하려고 하는 등 명백하게 이스라엘의 ‘인종 청소’에 합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가 계획한 가자지구 개발의 내용은 경악스러울 정도다. 미국이 가자지구를 10년간 통치하는 동안 가자지구 주민 200만명은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수용 시설에서 살아야 한다.


그 바탕으로 지금껏 번영해 와


그런데 수심정기(修心正氣)하고 다시 살펴보면 너무 낯익은 광경 아닌가? 이 프로젝트는 유럽 백인들이 북아메리카에서 미국을 건국할 때의 방식과 너무도 닮았다. 이를 일러 학자들은 정착식민주의라고 부르는데, 이미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신대륙이라 억지를 쓰며 선주민들을 학살하고 특정 구역에 감금해서 만들어진 사회를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미국의 방식을 흉내 내며 그동안 팔레스타인에 취했던 태도와 다름없으며, 현재 벌어지는 일은 그것의 ‘최종 해결책’인 것이다. 결국 미국과 이스라엘은 근원적으로 쌍둥이 나라인 셈이다. 이쯤 되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과 그 정당성에 대한 뻔뻔한 강변은 ‘히틀러의 사후 승리’(지그문트 바우만)이다. 한술 더 떠 가자지구 학살을 비난하기라도 하면 미국과 이스라엘은 ‘반유대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역공을 취하고 있다.


베니거가 어떤 의미로 발언했건 살아 있는 것을 ‘줄임’으로써 국가와 경제의 효율이 향상됐고, 그것이 지금까지 관철되고 있는 게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라면, 현재 땅밑에서 하늘까지 지배하고 있는 이 문명을 다시 곱씹을 필요가 있다. 유대인 혐오와 학살에 대한 역사적 책임이 있는 서구 국가들이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대량학살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유색인종을, 자연을, 이주민을, 동물을, 바다와 강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죽이고, 편취하고, 내버리고, 불태워왔기 때문이다. 그 바탕 위에서 지금껏 번영을 누려왔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말년에, 서구 근대문명의 극복은, 그것을 출발시킨 유럽에서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가 틀린 것 같다.


황규관 시인


경향신문 2025년 9월 21일 


https://www.khan.co.kr/article/202509212124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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