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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경] ‘탁월한 질문의 설계자’ 소설가 성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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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10-24 10:25 조회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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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나의 소설은 잘 읽히는 편안한 문장으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에 다다른 독자는 선명한 감동이나 새로운 앎 대신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을 떠안게 된다. 이는 소설 속 인물들이 손쉬운 일반화에 저항하며 우리의 이해를 흔들기 때문이다. 거동이 불편한 농인인 도호 할머니가 악덕 건물주의 면모를 보여줄 때(‘언두’), 우연히 말을 섞게 된 70대 할머니가 스턴트우먼이자 성소수자로 살아온 세월을 들려줄 때(‘화양극장’), 한국계 3세대 미국 이민자가 태극기 집회의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한국적인 환대를 경험할 때(‘스무드’), 몸주신을 빼앗긴 박수무당이 접신 없이 작두에 올라 “진짜 가짜”가 되기를 감행할 때(‘혼모노’) 우리는 인물들에 내재한 균열과 다층성 앞에서 모든 확신과 통념을 내려놓게 된다.


이처럼 독자를 무장해제시킨 작가는 감정도 역사의식도 없는 ‘가짜 이해’가 아니라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경계면에서 솟아나는 ‘진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성해나는 성실하고도 정교한 질문의 설계자라 할 만하다. 특히 역사적 사건을 먼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개인들의 몸과 장소의 문제로 현재화하여 질문하는 방식은 등단작 ‘오즈’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난 특징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몸에 일본군이 새겨넣은 타투(‘오즈’), 가보로 애지중지해 왔으나 친일파 조상의 치부를 드러낸 할아버지의 도검(‘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는 신념으로 설계한 갈월동의 고문실(‘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4·3 학살과 고려인 강제이주의 상처를 담고 있는 제주와 카자흐스탄의 헛묘들(‘괸당’)은 그때와 지금, 저곳과 이곳, 과거의 사람들과 현재의 사람들, 상처와 상처를 연결하는 살아 있는 질문이 된다.


성해나는 자신의 좌우명으로 ‘더 나아갈 수 있지만 멈춰보는 태도’를 꼽은 적이 있다. 이는 작품을 미결정의 상태로 모호하게 끝맺는 방식과 상통한다. 작가가 더 쓰고 싶은 욕망을 멈춰 세운 지점에서 독자는 자신의 욕망과 대면한다. 야생성을 상실한 호랑이를 만질 때의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처럼 알 수 없는 위험한 타자를 이해의 올가미로 길들이고 싶은 욕망이 거기에 있다. 성해나는 허구에서 빠져나오는 출구에 현실과 연결되는 모럴의 거울을 설치해 두고 독자에게 이야기의 바통을 넘겨준다. 이 모든 이야기와 당신은 무관하지 않다고.


오연경 문학평론가 


경기일보 2025년 10월 15일 


https://n.news.naver.com/article/666/000008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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