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경] 이야기 속에서 삶을 결심하는 시인 김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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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10-24 10:25 조회2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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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혁 시인은 이야기로 집을 짓는다. 그에게 이야기는 단순히 줄거리를 지닌 말의 형식이 아니라 삶을 견디고 살아내는 거주의 형식이다. “사육장과 게양대 사이에 앉아서 나는 이 이야기를 지어냈다”(‘유전’)는 첫 시집의 문장은 마치 출사표 같다. 학교는 먹이고 기르는 사육장이자 관념을 주입하는 게양대이지만, 시인은 그곳에서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 자랐다. 이야기는 먹고 늙고 죽어간다는 무심한 사실과 삶에는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는 관념 사이의 간극을 메워준다. 사실 쪽으로 기울면 냉소주의자가, 관념 쪽으로 기울면 낭만주의자가 되겠지만 시인은 양쪽을 매개하는 이야기꾼으로 삶을 바라본다.
김상혁은 누구나 이야기로 집을 지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연히 당신에게는 어떤 집이 있”어서 도적과 한파를 막아줬다면, 동시에 그 집이 “어떤 당신을/ 강도로, 좀도둑으로, 지긋지긋한 아버지로”(‘집은 그럴 수 있다’) 만들지 않는 집이기를 바란다. 집으로 찾아드는 행운과 불행은 우연일지라도, “크든 작든 사람을 닮은 그 무엇의 기쁨과 슬픔”(‘어떤’)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시인은 “하나같이 슬픔의 왕들”뿐인 세상에서 그들보다 덜 슬픈 것 같은 “내가 무언가를 말해도 되는 걸까”(’슬픔의 왕‘) 주저한다. 그러나 슬픔에는 비교할 만한 크기도 무게도 없다. 다만 슬픔들 사이에 아득한 거리가 있을 뿐이다. 그는 타자라는 머나먼 별을 생각할 때 “나의 생각이 별까지의 거리를 한 번에 뛰어넘을 수 없도록”(「아내를 지나 양을 지나 염소를 지나’)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시인이 이토록 이야기에 진심인 이유는 이야기가 삶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이다. 삶은 늘 “너는 무엇을 더 빼앗길 수 있나?”(‘작은 집’) 을러대며 쳐들어와 끝내 소중한 아이를 데려간다. 그러나 불타는 곳에 남은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가능성’)고 시인은 단언한다.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진실이지만, 나쁜 마음을 고치지 않아 서로를 무너지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다.
우리는 진실 앞에서 무력할지라도, 적어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나쁜 마음을 고치기 위해, 슬픔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이곳에 기쁜 나무를 심기 위해 이야기가 꼭 필요하다. 지금까지 네 권의 시집을 통해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 시인의 집 짓기는 삶에 대한 최선의 사랑이었다.
오연경 문학평론가
경기일보 2025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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