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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대통령의 자폭과 국민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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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1-08 14:44 조회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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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나 국회가 각자 권력 행사하며 서로 견제하는 근거가 민주적 정당성 개념


이를 만든 독일은 그 핵심인 국민투표를 정작 시행한 적 없어


투표 과정에서 생기는 분열과 혼란 걱정 때문


1987년 이후 개헌투표 없는 한국도 사정 유사하지만 대통령 계엄 선포 이후 시민들의 수준 확인


다시 시작된 개헌논의 독일처럼 편한 방법만 찾지 않아도 될 것


근대적 의미의 헌법과는 거리가 있지만, 비스마르크가 독일제국 탄생을 선포하면서 제정한 1871년의 헌법은 제국의회의 의결로 발효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공화국을 수립한 뒤 마련한 1919년의 바이마르 헌법의 정식 명칭은 종전과 같은 독일국헌법이었고, 국민투표를 거치지 않았다. 바이마르 헌법은 기본권과 경제 조항으로 역사적 이정표만 남긴 채 단명했다. 새 헌법의 등장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기다려야 했다.


동서로 양분된 두 개의 독일은 1949년 각자의 헌법을 제정했다. 서독은 헌법 대신 기본법이라는 제호를 선택했다. 헌법이라는 이름은 통일 독일을 위해 유보했다. 국민투표를 하지 않고 미국·영국·프랑스의 승인을 얻은 다음 11개 란트의 비준을 거쳤는데, 10개 란트가 찬성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서독기본법은 한동안 ‘연합국 헌법’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동독은 인민위원회를 거쳐 소비에트 군정의 승인으로 헌법을 만들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서독기본법에 의하면 동독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제146조는 국민투표를 통해 통일 독일의 헌법을 제정하는 방법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을 원했다. 제23조에 따라 동독의 5개 주가 개별적으로 서독 연방에 편입하는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그로써 기본법 아래서 통일 독일을 완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일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다. 1991년 연방 상하원은 공동헌법위원회를 구성해 진지한 논의를 펼쳤다. 결론은 따로 헌법을 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정도 있었겠지만, 일관된 이유 하나는 국민투표를 거치는 과정에서 발생할 무질서보다 기존의 안정적 체제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독일은 역사상 국민투표를 시행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 민주적 정당성이라는 개념과 용어를 만든 국가가 독일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재미있는 현상이다. 민주적 정당성은 근대 헌법과 함께 국가 권력기구의 구성과 운영에 만병통치약처럼 작용하는 상징적 힘이다. 대통령이나 국회가 각자의 권력을 행사하고 상대방을 견제할 수 있는 형식적이고도 실질적인 근거가 민주적 정당성이다. 민주적 정당성의 정화가 바로 국민투표다. 독일은 민주적 정당성의 의미나 가치보다, 국민투표를 거치는 과정에서 발생할 격렬한 토론을 넘어서는 국론 분열과 혼란의 무질서를 피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경우 단일한 목적으로 모든 유권자가 동시에 의사를 표시하는 국민투표 형식은 대통령 선거가 대표적이다. 선출이 아닌 찬반 의사를 묻는 전형적 국민투표의 하나는 개헌 절차다. 1987년 이후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의 기회가 한 번도 없었던 현실의 이면에는 독일과 유사한 사정들이 있다. 그래서 필요한 개헌은 하되 혼란을 최소한으로 줄이겠다는 의도에서 ‘원포인트 개헌’이란 말까지 나왔다.


최근 대통령의 임기와 관련해 다시 개헌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자폭과 같은 비상사태 선포에 반응하는 시민들의 태도를 보면, 우리는 민주적 정당성을 어떤 형태로 발휘해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과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독일처럼 일말의 두려움 속에 편한 방법만 찾지 않아도 되는, 어지러운 사태 가운데서 질서와 지혜를 발휘하는 국민의 국가를 지켜 가고 있다. 다만 상대방의 어리석음이 나의 현명함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성찰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차병직 변호사 

법률신문 2024년 12월 18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20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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