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 이처럼 사소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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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2-05 13:30 조회1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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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가명) 엄마한테 전화가 안 오네. 일주일 됐는데.” 처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언제까지 기다려준다는데?” 내가 물었다. “며칠 못 기다린대. 엄마가 무기력증에 빠진 것 같아. 애 상황을 모를 리 없는데.”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기관이 찾아가야 한다고. 기다리지 말고.” 처가 한숨을 쉬었다. “센터장 말이 그거야. 자기가 찾아다니며 설득해야 된다고. 혼자라 센터 유지만도 힘들다며 나한테 고마워하더라고.”
초등학교 1학년 영욱이는 작년 가을, 밤 산책 나간 처가 옆 동네 공공임대아파트 앞 편의점에서 우연히 만난 사내아이다. 늦은 밤 아이 혼자 개를 데리고 다니길래 웬일인지 물었더니 아빠는 없고 엄마는 술 마시느라 안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이는 처에게 ‘플러팅’을 했다. “같이 컵라면 먹을래요?” 처는 라면을 먹는 대신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함께 놀다 보냈더니 다음날 또 왔다. 유아차에 모형총을 가득 싣고서. 총이 좋다는 아이에게 총은 무서운 거라며 달랬다. 아이는 다시 오지 않았다. 처는 아이를 만난 편의점에 가끔 들러 소식을 묻곤 했다.
그 아이가 지난주에 불쑥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다. 여전히 홀로 떠돌고 있었다. 이웃에게 소개받은 지역아동센터에 문의하니 마침 여석이 난다며 신청하란다. 매일 밥도 먹고 같이 놀이도 한다며 아이에게 가기를 권하니 좋아했다. 엄마가 관건이었다. 처는 편지를 써서 아이 집에 찾아가 전했다. 그리고 일주일째 답이 없는 것이다. 이것저것 서류를 내야 하는데, 그럴 의욕마저 없어 보이더라는 처의 말이다.
현직 교사인 저자가 10여년간 만나온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책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는 빈곤이 어떻게 청소년의 삶을 뒤틀고 우울하게 하며, 때로 반짝이는 지혜와 통찰을 벼리게 하는지 가슴 시린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 ‘캄캄한 삶’을 살고, 교정 시설을 드나들기도 한다. 대학만이 탈출구라며 아등바등 공부해서 진학하지만 알바 세개를 뛰다가 서러워 울기도 하고, 이 악물고 졸업해서 안정된 직장에 취직했건만 부모의 빚 탓에 가난은 극복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저자는 강조한다. 이들은 청소년센터를 찾아올 만큼은 운이 좋았던 경우라고. 한국의 선별 복지 체계는 당사자의 신청을 원칙으로 한다. 복지기관이 고통에 빠진 이들을 먼저 찾아가 설득할 동기도, 여력도 부족하다. 운 좋게 좋은 어른, 기관을 만나지 못하는 대다수는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조차 모른 채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영욱이를 바라보는 지금 우리 심정도 그렇다.
분단된 세상이다. 우리 동네도 그렇다. 한 동네가 단독주택 구역과 다세대주택 구역으로 나뉜다. 우리 집은 단독 쪽에, 우리가 참여하는 협동조합 책방은 다세대 쪽에 있다. 단독 쪽에는 중산층이 산다. 다세대 쪽 주민은 근래에 많이 바뀌었다. 신도시에 공공임대 단지들이 들어서자 한국인 젊은 세대는 대부분 떠났다. 그 자리를 노인과 이주노동자가 채웠다. 다세대 쪽 편의점 주인에게 물어보니 고급 아이스크림이나 와인은 할인행사 때도 안 팔린단다. 소주, 막걸리만 팔린다고.
작년 언제인가, 책방지기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건너편에 산다며 책방 앞 평상에서 외국인들이 밤에 술 마시며 떠드니 평상을 치워달라는 것이었다. 시끄러워서 문제인지, 외국인이라서 문제인지 물었다. 잠시 당황하더니 시끄러워서 문제라고 답했다. 조합원들과 의논해서 평상은 두되 밤 10시 이후에는 조용히 해달라고 그림으로 그려두었다. 전화는 다시 오지 않았다.
우연히 홀로 사는 다세대 쪽 남성 어르신과 인사를 나누게 된 처가 말을 건넸다. 우리 집은 대문도 담도 없고 텃밭에서 쉬기도 좋으니 편히 오시라고. “나 같은 수급자가 어찌 거기를…” 하며 펄쩍 뛰더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다세대 쪽 이주민이나 노인들은 바로 옆인데도 단독 쪽으로는 다니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담이 없지만 우리 동네는 담이 높다. 이렇게 ‘두 세계’가 있다.
높은 담 이편에 사는 이들은 무심한 중산층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연초에 한국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는 파주의 한 이주노동자가 집에 불이 나는 사고를 당했다. 다친 사람 없다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이주노동자 벗들과 지역 이주노동자센터의 여러 분이 물심양면 돕고 있다고 한다. 동네 톡방에 도움을 청했더니 먹거리부터 옷가지, 이불, 살림살이까지 상당한 양이 모였다. 이웃의 밴에 가득 실어 전했는데, 그 후 다시 물품이 쌓였다. 겨우내 한적하던 동네가 부산해졌다. 무심한 듯 보이던 이들이 더 많이 내놓으며 안타까워했다.
지난 토요일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출신의 살레 알란티시씨가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우리 책방을 찾았다. 네차례 전쟁에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연을 전하며 그는 “돈보다 관심이 더 절실하다”고, “이 비극을 더 널리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이웃들은 함께 시를 낭송하며 작은 동네에서 멀리 있는 이들의 고통을 느꼈다. 우리 마음속에 무언가가 있다. 다만 무언가 계기를 만나야 한다. 우리 동네의 보이지 않는 담을 낮출 계기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는 주인공 펄롱과 처 아일린의 대화 장면이 나온다. 이웃집 아이가 추운 날 땔감 주우러 길에 나온 걸 본 펄롱은 마음이 불편하다. “우린 참 운이 좋지?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다섯 아이 키우기도 벅찬 아일린은 착하기만 한 남편이 답답하다. 하지만 펄롱은 불행이 내 가족에게 닥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걷는다. 위태로웠던 유년을 돌아보며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이 자기 삶을 구원했음을 깨닫는다. 학대받던 한 아이의 손을 잡고 내걷는 펄롱의 걸음은 사소하지만, 그 한 걸음 덕분에 우리는 조금 더 인간의 편으로 다가간다.
계엄, 내란, 민주주의같이 큰 말들이 우리를 사로잡는 시절이다. 마땅한 일이다. 몰아치는 극우 반동 앞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회의하게도 된다. 큰길과 광장에서 싸우다 마음이 헛헛해질 때 잠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디딜 나의 한 걸음은 무얼까, 생각하며.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 2025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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