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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새 '바보배'의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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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7-16 11:02 조회3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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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 브란트의 유산 1494년 출간 《바보배》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고 풍자하려 써


왕부터 농부까지 각양각색의 바보들이 같은 배에서 벌이는 부조리한 풍경 묘사


"강도는 몰래, 변호사는 대놓고 껍데기 벗긴다" 법률가 향한 날 선 비판


사익 위해 진실 은폐 눈 가린 '정의의 여신' 이 책 삽화에서 비롯


2025년 6월 들어서며 우리가 띄운 '바보배' 이성과 지혜의 언덕에 무사히 닿을 수 있길


1494년에 출간된 《바보배》는 부제가 ‘바보들에 관한 원전’이다. 저자 제바스티안 브란트는 신성로마제국 시절 독일의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스위스 바젤 대학에 다녔고, 거기서 법학 교수로 강의했다. 법률·정치·종교에 관한 글은 물론 라틴어로 시도 쓰다가, 종교개혁 직전 중세 사회의 타락한 모습을 풍자한 《바보배》를 완성했다.


권력에 기대고 눈앞의 이익만 좇는 바보, 재물을 탐하는 바보, 낭비와 쾌락에 빠진 바보, 말과 행동이 다른 바보, 질투와 증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바보, 아이들 앞에서 창피한 줄 모르는 바보, 일 안 하고 그저 먹으려는 바보, 노름에 빠진 바보, 점괘에 매달리는 바보 등 각양각색이다. 왕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성직자, 귀족, 학자, 관리, 군인, 법률가, 상인 등 모두 바보배를 타고 떠난다.


바보배 이야기를 쓴 이유는 머리말에 밝혔다. “세상의 모든 겨레와 나라에 쓸모 있고 약이 되는 교훈을 베풀고 다그치며, 지혜와 도리와 바른 풍속을 세우고, 나아가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미망과 그릇됨과 몽매를 조롱하고 징벌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아 이 책을 집필했다.”


악덕과 어리석음에 빠진 인간들이 모인 부조리한 사회의 광경을 읽고 각성하여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취지다. 저자 자신도 배의 맨 앞쪽의 책 더미 속에 파묻혀 박식한 척하는 바보로 자처한다. 문맹의 독자를 위해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목판화도 곁들였다. 112개의 장에 빠짐없이 붙은 그림은, 보기만 해도 자기가 어디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는 바보거울 역할을 한다.


의술을 배우고 병은 못 고치는 의사도 비웃지만, 자신이 법학자였던 만큼 법률가들에게 신랄하다. “강도는 남몰래, 변호사는 대놓고 껍데기를 벗긴다네!”, “그놈의 돈이 원수지 다른 이유가 있겠나? 한 놈은 펜을 들고, 다른 놈은 칼을 들었다는 차이뿐”, “따지고 보면 둘 다 없으면 안 될 존재 아니겠나?”라며, 강도와 법률가들에게도 바보배에 승선할 것을 권유한다. 단, 자비 부담으로.


《바보배》가 법률가들에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제71장 때문이다. 원래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부릅뜬 채 한 손에 칼을, 다른 손에는 천칭을 들고 있다. 옳고 그름을 저울질하여 단칼에 집행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눈이 가려진 여신의 형상이 등장했는데, 《바보배》의 삽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판단한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와전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제71장의 제목은 〈시비 걸고 소송 거는 바보〉다. 어린애들처럼 싸움질이나 일삼는 바보들이 진실의 눈을 가린다는 내용으로, 바보 한 명이 정의의 여신 뒤에서 헝겊으로 눈을 감싸는 그림이 붙어 있다.


바보들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정의나 진실도 숨기려 한다. 법과 재판의 세계에 국한된 우화가 아니다. 우리의 정치 공동체가 대형 선박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거기에 올라탄 바보들이다. 너와 나, 모두가 바보라는 사실은 아우구스투스가 서구 철학의 한계로 언명한 한마디가 증명한다. “이성적 판단을 훈련받은 사람들이 왜 비이성적 행동을 하는 것일까?”


바보배는 여기저기서 수시로 출항한다. 브란트 시대 바보배의 목적지는 이성과 지혜의 근대성이 꽃피는 언덕이었다. 우리도 2025년 6월을 맞아 새 바보배를 띄웠다. 기항지에 도착하면 우리는 현명해질 수 있을까? 목표 지점에 닿을 때 지금보다 삶이 나아지고 우리가 현명해지기를 기대한다면, 오늘의 우리는 모두 바보다. 바보들이니까, 희망을 가진다. 모두가 나은 세상이기를 바라는 저편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 바보신문 바보편집인 씀.


차병직 변호사 


법률신문 2025년 6월 18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208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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