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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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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10-17 09:31 조회56,9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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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재미’
시집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8)

 

시는 인간의 언어로 쓰이지만,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이해를 시도할 때야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고 여겨지던 말의 관습을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강력히) 비틀면서 시 안에 자리하는 시어들이, 어떤 울림의 주인은 인간의 것만은 아니라고 일러주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상식적으로는 목적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물이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방에 말을 걸기 시작한다거나, 습관적으로 통용되던 의미의 문을 닫은 채 말이 활용되는 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배운다. 인간이 아닌 인간 주변의 (혹은 인간 사회의 바깥에서) 숨 쉬고 생활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 저마다 나름대로의 소리뭉치로 또는 호흡의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표현을 계속해서 할 줄 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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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한 마리의 퓨마가 동물원을 탈출했다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부터 이영광의 시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다음의 시를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의미를 전하는 말로 이루어졌다고 여기지 말고, 말에 담긴 통증만을 적확히 전하고 싶어하는 신음(呻吟)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기며 읽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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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수천의 벙어리들이 몸속에 산다/ 시끄러워 죽겠다/?/ 창밖은 언제나 공중이다/ 공중은 거대한 눈알이다// 그는 베란다에 매달려,/ 쇠창살을 쥐고 괴성을 지르는/ 동물원 영장류처럼// 나에겐, 재미가 없다/ 재미라곤 없단 말이다”(이영광, ‘재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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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수백 수천의 벙어리들”을 끌어안고 사는데도 “시끄럽다”고 신음하는 이라면, 그이에겐 침묵도 그냥 침묵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말하고 들을 줄 아는 이일 것이다. 또한 어쩌면 “쇠창살을 쥐고 괴성을 지르는” “영장류”와 다르지 않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공중”의 “거대한”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이의 “재미라곤 없단 말이다”고 외치는 절규에서 우리는 자유로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저지당한 자의 절망과 거기서 달아날 수 없는 자의 무기력을 동시에 본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가 그이를 쳐다보기만 하는 바로 그때, 우리는 그이를 관람하고 감시하는 “거대한 눈알”의 부분이 된다. 분명 쳐다보는 것은 우리인데 그이의 목소리가 우리 주변에 가득 찬 나머지, 그이의 절규와 만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어쩐지 더 고립되어버린 듯하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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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8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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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64532.html#csidx9445e5660f2a0ebb478dd487484f2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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