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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벌거벗은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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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12-12 14:18 조회8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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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법학은 개념과 논리 통해 본질과 정의라는 정답 찾아 나섰지만 개념을 파고들수록 답 모르는 질문만 남아


철학은 한계 인정 은유 받아들였지만 법학은 여전히 머뭇 은유를 가볍게 여겨 베일에 싸인 주권이 주권 보호하는 것 몰라


벌거벗은 진리는 진리일 수 없어 법학도 은유 수용 어렵지만 이해는 해야


자이스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다. 전설에 의하면, 자이스의 신전에는 여신 이시스의 상이 베일에 가린 채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아래쪽에 씌어진 문구는 이랬다. “나는 존재하고 있고, 존재하였으며, 존재할 모든 것이다. 어떤 인간도 나를 가린 베일을 걷지 못했노라.” 지식욕에 불타는 청년이 밤중에 신전으로 잠입했다. 여신상의 베일을 벗기고 무엇을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대가로 청년은 삶의 기쁨을 잃고 죽음을 맞았다. 진리의 본질은 인간의 지적 욕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은유다.


옛날의 철학은 개념으로 파악되는 인간의 사유만 가치 있는 것으로 다루었다. 법학도 개념을 앞세운 뒤 정당화의 근거를 연결하여 논리를 구축했다. 철학이나 법학의 목적은 문제의 해결, 즉 결말이었다.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였고, 가능하다고 믿었기에 학문으로서의 권위나 실용성도 자랑할 수 있었다. 해답의 불충분한 부분에 대한 욕망은 유일한 정답으로 향했다. 철학은 사물과 현상의 본질, 법학은 정의였다. 본질이나 정의는 진리와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개념을 쪼개고 깊이 파고들면 정답을 발견할 줄 알았는데, 점점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원칙적으로 최종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들이 대부분이라는 현실의 딜레마에 부딪혔다. 그때 새로운 탈출구로 등장한 것의 하나가 은유였다.


개념의 시대에 은유는 수사학적 도구에 불과했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진지한 여정에서 명확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사유의 잔여물 취급을 받았다. 뭔가 흐릿한, 불완전한 사고의 산물이 은유였다. 그러나 개념으로 더 이상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 영역에 이르러서는 은유밖에 없다는 것이 새로운 결론이었다. 철학은 그렇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법학은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은유와 상징으로 받아들였던 신화의 세계에서 논리적인 로고스의 세계로 겨우 들어왔는데,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애써 구축한 자기 건물을 부분적으로 허무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각종 이론은 현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심지어 우리가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조차 해석의 결과물일 수 있다. 먼지같이 무수한 사실들 중 일부를 합치고 잘라내어 사건이라고 명명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진리나 진실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사물의 본질이나 정의의 실체는 그 시대의 권위적 옷을 입힌 것이다. 옷을 들춰내면 바라는 정답이 있을 것 같지만, 옷 속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맨몸이 실체는 아니다. 진리나 진실도 벌거벗은 상태에서는 수치심을 느끼듯 그대로는 인간 세상에 적응하고 우리와 소통하지 못한다. 베일이든 옷이든 완전히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 겹 벗겨내면 다른 겹이 나타난다. 베일과 그 뒤에 가린 신상의 총체가 개념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은유다. 그래서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벌거벗은 진리는 진리일 수 없다고 했다.


법률가는 베일 뒤에 숨은 형상을 개념이라고 믿는 직업인인데, 은유 따위는 가볍게 여긴다. 여태까지 지녀온 개념을 포기하고 모호성을 이용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일은 어림없다. 베일을 벗기는 방법만 능사로 안다. 법률가 출신이 주류를 이루는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주권을 문자의 의미 그대로 현실에 가져다 사용하려 한다. 주권에도 은유가 내포돼 있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대의제도는 무색해진다. 주권의 베일이 주권을 보호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광장의 주장은 주권 표출의 일부이지만, 주권 자체는 아니다. 정치는 주권에 기댈 수는 있어도, 주권을 직접 사용할 수는 없다. 이번 칼럼 역시 전체가 은유다. 


차병직 변호사(법률신문 편집인)


법률신문 2025년 10월 22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21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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