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 복수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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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12-12 14:18 조회9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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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형벌을 통해 악행 응징하지만 개인의 복수 감정은 여전히 남아
복수의 대상은 행위인가 행위자인가 한발 물러나 생각하면 행위와 행위자는 분리하기 쉽지않아
국가의 일차 관심은 행위와 같은 현상 현상엔 원인이 있지만 원인의 원인도 있기에 제도 개혁과 입법은 그만큼 어려워 신중해도 걱정이고 단호해도 걱정
대중은 오락가락해도 변화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란 영화 한 편이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됐다. 자파르 파나히의 ‘그저 사고였을 뿐’인데, 2025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체불 임금을 요구하다 끌려가 눈을 가린 채 고문을 당한 경험을 가진 주인공이, 훗날 우연히 도움을 청하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만 듣고 자기를 고문한 정보원이라고 알아챈다. 심한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그 사내를 납치해 생매장할 기세로 덤볐다. 한사코 부인하는 바람에 그가 고문을 한 정보원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고문 피해자였던 자신이 린치 가해자가 될 수 있기에, 결정적 순간에 주저하며 신중해졌다. 주인공은 그 사내를 끌고 다른 고문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정체 확인을 시도했다. 이란에서 반체제 인물로 두 차례 투옥됐던 감독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다.
미국에 망명한 김대중과 가택 연금된 김영삼을 대신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았던 6선 의원의 정치인 김상현도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에 반대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남산인지 어딘지 알 수 없는 지하 조사실에 들어서는 순간 몰매를 맞았다. 훗날 본인 스스로 만들어낸 우스갯소리에 의하면, 수사관이 5분만 시간을 주었어도 고문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그만큼 상대를 설득할 자기의 언변에 자신이 있었다는 말 이다.
2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뒤, 김상현은 수소문 끝에 자기를 고문했던 수사관을 찾아갔다. 약간 놀라며, 귀찮게 왜 이러나 하는 눈치의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의 본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제도와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다소 생뚱맞다는 듯한 표정의 그를 뒤로하고 돌아왔다. 그 사실을 안 주변 사람들은 “굳이 그럴 것까지 있느냐”라고 했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하고, 명절에는 작은 선물도 보냈다. 그 수사관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문상까지 갔다. 얼마 후 시내를 걷다가 두 사람이 마주쳤다. 그 수사관은 김상현을 보자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이것은 2018년 4월 서대문 가재울성당에서 열린 김상현 영결식에서 신부 함세웅이 추모객들에게 들려준 회고담이다.
나쁜 행위에 대한 제도적 응징은 국가의 형벌이지만, 누구나 복수의 감정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다. 형벌권의 행사를 바라보는 눈도 어느 정도 복수를 기대한다. 어떤 형태로든 복수는 가능하다. 복수를 한다면, 그 대상은 행위인가 행위자인가? 영화 속의 피해자들에게는 당한 행위가 일차적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김상현은 행위자에게 비중을 두었다. 영화의 등장 인물들도 처음에는 즉각적인 복수의 폭력성에 촉발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할 여유를 가진다. 가해자도 일상에 둘러싸인 인간이라는 뜻밖의 사정도 이해한다. 결국 행위는 행위자와 분리할 수 없다는 당연한 결말에 이른다.
행위를 제거하듯 행위자를 응징하면, 직접적이기는 하나 효과가 의문이다. 행위의 원인인 행위자의 교화에 치중하면, 효과적일지 몰라도 기다리기 어렵다. 조금 깊이 생각하면, 행위자가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은 사회 환경과 제도 탓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가의 일차적 관심은 행위와 같은 현상이다. 현상에는 원인이 있지만, 그 원인의 원인도 있다. 제도의 개혁이나 입법이 어려운 이유다. 신중하면 효과가 없을까 걱정이다. 단호하면 본질적 문제의 해결과 멀어 보인다. 시민들의 마음은 이것이었다 저것이었다 한다. 그러나 변화를 바라는 마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차병직 변호사(법률신문 편집인)
법률신문 2025년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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