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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달콤쌉싸름한 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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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4-12-04 11:36 조회4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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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가 서준식 미결수가 입던 수의 오랜 관행에 문제 제기 사복 허용 끌어내


장기간 독방 감금을 위법이라고 판단한 서울고법 최근 판결


NGO, 재야 활동가가 행정부 사법부보다 인권 앞선다는 통념 깨


통념은 낡은 고정관념 깰수록 나은 방향 보여 누가 손잡이를 당겼든 새로 열린 문 환영


국가보안법위반과 보안관찰로 17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서준식이 석방된 지 10년째 되던 1997년 후반에 다시 구속되었다. 그가 집행위원장으로 진행했던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한 조성봉 연출의 <레드 헌트>가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였다. 4·3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무사했고, 상영한 사람만 재판을 받게 되었다.


서준식은 인권운동가답게 자신의 재판을 인권운동의 일환으로 삼고자 아이디어를 냈다. 접견실에서 변호인에게 수인번호가 달린 옷깃을 가리켰다. 재판 때도 그대로 입고 나가야 할 미결수의 제복이었다. 구속피고인이 법정에서 수의를 입어야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평상복 차림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구속피고인이 수의가 아닌 옷을 착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겨우 포승만 푼 채 수갑까지 차고 법대 앞에 섰다.


재판이 열리던 날, 피고인의 가족은 양복 한 벌을 보자기에 싸들고 왔다. 변호인들은 미리 재판부에 평상복 착용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제출해 두고 있었다. 단독판사는 시작과 함께 특별한 제안에 대한 판단부터 했다. 결론은 기각이었고, 이유는 간단했다. “행형목적상 필요에 따른 오래된 관행이므로 피고인에게만 특혜를 줄 수 없다.”


손에 잡히는 인권 확장 시도의 기획자들은 실망했다. 재판 때 수의 착용은 행형목적과 무관하고, 법정의 질서유지 권한은 재판장에 속한다. 관행은 굳이 지켜야 할 덕목이 아니며, 잘못된 경우 즉시 폐기해야 옳다. 당연한 것을 허용하는 조치가 특혜가 될 수 없으며, 한 번 시행으로 일반화되면 선도적 역할을 하는 셈이 된다. 그날의 재판장은 인권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기억될 기념비적 결단을 포기하는 대신, 사건 당사자들만 잊지 못할 안전한 결정을 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수개월 뒤, 법무부장관 박상천이 미결수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겠다며 법정에서 구속피고인의 사복 착용을 허용한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검찰권 남용 억제와 인권을 위한 혁신적 조치라는 홍보 문구까지 곁들였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1999년 봄부터 시작된 구속피고인 사복 착용의 기원이다.


얼마 전 서울고등법원에서 복역 중인 재소자를 징벌하여 117일, 80일 연속으로 독방에 감금한 구치소의 처분을 위법하다고 판단했다(본보 11월 7일자 1,4면). 규칙을 위반한 수형자를 법령에 따라 처벌했다 하더라도, 장기간 지속적으로 징벌방에 홀로 감금한 것은 인권 침해로 재량권의 일탈이나 남용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4년 전, 무려 여덟 차례나 징벌을 받아 독거실에 갇혔던 불량재소자가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진정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구치소가 규정대로 징벌하여 위법이라 볼 수 없다며 기각했다. 불복한 수형자가 국가인권위원회의 기각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위원장은 인권단체 등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법원의 재판처럼 실정법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전향적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이 위원회의 임무이며, 따라서 법률가보다 활동가를 인권위원으로 임명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본보 10월 24일자 15면, <인권의 렌즈>)이 무색하게 되고 말았다.


행정부보다는 사법부가, 사법부보다는 재야의 활동가와 NGO가 인권을 위해서는 선도적이며 진보적이라는 통념이 깨지는 실례들이다. 통념이 깨지면 조금 허탈하고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진취적이며 적극적으로 방향을 제시했던 과거의 일관된 주장이 보수적이며 수동적인 기관을 일깨운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통념은 낡은 고정관념이며 깨뜨릴수록 나은 방향으로 가는 문을 여는 셈이니까, 누가 손잡이를 당겼든 환영할 일이다.


차병직 변호사 

법률신문 2024년 11월 20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20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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