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직] 서툴고 어수룩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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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2-05 13:30 조회1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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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 러시아 사회 변혁에 예술 이용 권력 멀리한 이들은 바보처럼 처신 심오한 이념 표현하려 거칠고 엉성한 어휘 써
최고경지에 오르면 추종자보다 적이 많아 세상과 친숙해지려 서투른 척 행동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논리에 빠진 한국 모두가 전문가 비평가
조금씩 서툴러 보이면 가능성 열리지 않을까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말이 있다. 진실로 큰 솜씨는 겉으로 보기에 마치 서툰 것처럼 느껴진다는 의미다. 모순어법의 이 표현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다. 대단히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진정 달변가는 어딘가 어눌해 보인다. 고요함은 요란함을 이기고, 차분함은 들뜬 열기를 이긴다.
문화적 배경과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러시아의 유로지비도 그런 유의 하나다. 일부러 미치광이 비슷한 행세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가장된 외형은 진정한 의도를 가리기 위해서다. 미치광이의 내면에는 현자가 도사리고 있다.
러시아의 유로지비는 사회주의 체제와 관련시켜 살피면 이해가 쉽다. 혁명 직후 러시아를 지배했던 공식 예술 이념은 ‘사회주의 리얼리즘(SR, Social Realism)’이었다. 레닌은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토마스 캄파넬라의 소설 《태양의 나라》를 읽고 이상적 사회에 대한 영감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 감동은 정치가 미학까지 지도해야 한다는 구체적 정책의 하나로 귀결되었다. 1905년에 쓴 논문 <당의 조직과 당의 문학>이 그 내용을 담고 있다. 레닌의 논문은 막심 고리키의 장편 《어머니》와 함께 SR의 기원이 되었다. SR이라는 용어는 레닌 사망 후, 공산당중앙위원회 서기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소비에트 작가회의에서 공식화했다. 미술은 교육 수단으로만, 시와 음악은 영웅들의 행적과 체제를 찬양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원칙 같은 것이다.
예술가들도 한때 흥분하여 사회 변혁에 참여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스탈린 같은 독재자에게는 충성하든 저항하든 자기를 희생하는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권력에 투항하지 않고도 살아 남는 경우, 그 사람은 유로지비임에 틀림없었다. 스스로 바보처럼 처신하면서 은근히 악과 부정을 폭로하는 공공의 광대 같은 존재, 그들은 가장 심오한 이념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칠고 엉성한 어휘를 골라 사용했다. 모든 농담은 이중 삼중의 의미가 겹친 우화였다.
유로지비와 그 유사한 존재들은 현실의 정치적 폭력으로부터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상황의 망명자였다. 그에 비하면 대교약졸을 처신술로 여기는 대가는 광장의 은자였던 셈이다. 진정한 대가에게는 추종자도 많지만, 적은 더 많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 일부러 서툴러 보이게 하는 의도는, 세상을 두려워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 두려움은 비겁함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세상과 친숙해지기 위한 타협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가들의 외형적 서툶과 유로지비류 인물의 의도된 어수룩함의 빈틈에서 얻는 교훈은 무엇일까? 완벽함에 대한 오해 같은 것이다. 나에게 결여된 부분이 있어야 타인과의 접점이 되어 어울릴 수 있다. 자기의 주장을 전부 관철시키는 것보다, 한 부분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는 게 좋아 보인다.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손해를 입지 않으려는 태도보다, 설득하려는 노력이 옳아 보인다. 상대방을 철저하게 굴복시켜야 내가 승리한다는 욕심보다, 패자가 좌절하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이 나아 보인다.
우리 사회는 명목상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논리의 늪에 빠진 지 오래다. 지식인 중 상당수는 솔직한 비판이나 항의를 표시하는 대신 잠자코 지내는 것을 현명하다고 여긴다. 국가권력이 아니라 여론을 두려워해서다. 모두가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 모든 사람이 전문가 아니면 비평가가 된 세상이다. 법률가, 정치인, 여론을 주도하려는 사람 들은 더 적극적으로 나선다. 저마다 너무 똑똑해서 협의가 불가능해 보인다. 조금씩 서툴러 보이면, 뭔가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누가 외치는 소리도 완전한 민주주의는 아니다.
차병직 변호사
법률신문 2025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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