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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민주주의 기상 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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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5-07 11:53 조회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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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생각 차이를 편 가르기 하는 시대


정치 신념의 양극화로 서로를 태워 이기려다 민주시민의 입이 정치적 화염방사기 돼


누구나 흥분하면 말의 뜨거움 못 느껴


열정을 절제 못 하면 민주주의 불태울 위험


우리가 만든 환경으로 가까운 미래까지 뜨거울 민주주의 기온 견디는 훈련도 해야


화씨 451도. 섭씨로 바꾸면 233도다. 물이 끓는 점의 두 배 이상이니, 일상에서 친숙한 온도는 아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종이가 타기 시작하는 온도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다.


미국 일리노이 출신의 브래드버리는 1950년 SF 잡지에 「방화수」라는 단편을 발표했는데, 반응이 괜찮아 장편으로 늘려 쓰기로 했다. 3년 뒤 창간한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제2호부터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 것이 《화씨 451》이었다. 소설이 묘사한 미래는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는 장치가 작동하는 사회다.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정보만 찾고 빠르고 간편한 문화에 중독된 사람들이 체제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독서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세상 이야기다. 주인공 몬태그의 직업은 불을 끄는 방화수(防火手)가 아니라 책을 태우기 위해 불을 붙이는 방화수(放火手)다. 간첩을 색출하듯 몰래 책 읽는 사람을 찾아내고, 압수한 책들을 쌓아 태 운다.


전체주의 사회의 일면을 확대한 암울한 미래 소설로 조지 오웰의 《1984》보다 더 실감난다는 평가도 받았다. 의미심장한 한마디는 작가의 인터뷰에 나온다. 책을 태우는 행위는 인간의 사고를 통제하려는 폭력적 정부보다 책을 싫어하는 보통사람들이 먼저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읽지도 않는 책은 굳이 태울 필요조차 없다. 그런 사람들은 괴물 같은 권력이 나서서 정보 유통을 관리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방관하여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다는 지적이었다.


국가권력에 의한 제도적 검열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상대로 검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점점 그렇게 변모해 가는 중이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감시한다. 옳음을 기준으로 어긋남을 판단하는 방식에서, 자기 편인지 다른 편인지 감별하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생각의 차이를 어떻게든 내 편 네 편 두 개의 큰 카테고리 중 하나에 밀어 넣어 분류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는 민주주의를 활발하게 만들기보다는 혼란을 야기한다. 생각과 표현의 제한으로 민주주의가 병드는 것에 반발해 무한정으로 나아가 보니 다른 형태로 병적 현상이 나타나는 형국이다. 정치적 신념의 양극화는 타인의 생각을 감별하고 감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주장을 적극적으로 밝히는 방식이 주류가 되었다. 의지가 강해질수록 자기와 다른 타인의 생각을 태워 없애버리려 든다. 태워야 이긴다고 여긴다. 민주 시민의 입이 정치적 적의 견해를 소각하려는 화염방사기로 바뀌어 간다.


입으로 불을 내뿜어 상대를 제압하려는 싸움에서는 SNS가 훨씬 효율적인 무기다. 가벼운 것이 압도적으로 빠르다. 영상도 메시지도 짧을수록 강력하다. 온갖 도구로 자기 주장을 내뱉어도 두렵지 않은 사회가 민주주의가 됐다.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종이를 태우는 발화점은 화씨 451도가 아니라 섭씨 451도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브래드버리가 책을 쓸 때 착각한 모양이다. 누구든 흥분하면 자기 입에서 나가는 말의 뜨거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는 바람직하다. 다만 자신의 정치적 에너지가 내뿜는 온도가 민주주의의 약한 부분을 태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산불을 감시하지 않으면 자연과 재산을 태우고, 정치적 열정의 발산을 절제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를 태운다. 그러나 우리는 뜨거움을 견디는 훈련도 해야 한다. 지금부터 가까운 미래까지 우리 민주주의의 기온이 그러할 텐데, 그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차병직 변호사 

법률신문 2025년 4월 2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206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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