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 독립 연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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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8-06 13:14 조회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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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를 내고 대학을 떠난 지 5년 반이 넘었다. 한국 대학의 구조적 문제와 지식 생산 체제를 비판한다며 거창하게 떠났지만 사실 막막했다. 직위도, 월급도, 연구실도 없어졌다. 갈 곳도 없었다. 독립 연구자의 길을 꿈꿨지만, 무적 신세로는 독립도 연구도 어려웠다. 실상은 고립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흘러 일상이 생겼다. 몇권의 책을 내고 번역도 했다. 글을 쓰고 강연도 한다. 그럭저럭 먹고산다. 한국연구재단에 개인연구를 신청해서 지원도 받았지만 곧 그만뒀다. 연구자 정체성이 희미해진 내 몫이 아니었다. 공부 모임도 몇곳 생겼다. 성격은 제각각이다. 책 읽는 모임, 연구자를 초청해서 배우는 모임, 좀 더 실천적인 관점에서 고민하는 모임 등이다. 독립된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에 가깝다.
강연이나 북토크를 통해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자극이 된다. 선생과 학생 관계가 아니니 권위의 뒷배 없이 설득해야 한다. 듣는 이의 처지를 고려해야 하고 잘 들어야 한다. 대학에서도 강의 평가에 신경 쓴다지만 부담감이 다르다. 지속성이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뒤늦게 소통으로서의 강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사실 나는 형편이 나은 편일 것이다. 짧긴 해도 정규직 교수를 지냈다는 간판이 있고, 학벌 카르텔의 이득도 누리는 입장이다. 남성이라 경력 단절과 차별을 고민할 일도 없다. 딱히 뛰어난 연구 실적도 없는데, 여기저기 찾는 이들이 있는 건 그런 기득권 변수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지금 대학 밖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이지만, 이 정도 일거리도 찾을 수 없는 좀 더 젊은 독립 연구자들이 매우 많다. 시야가 좁던 우리 세대보다 학문적 역량은 훨씬 뛰어날 것이다. 문제는 심각한 불균형이다. 한국의 대학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1990년대에 8만명쯤이던 대학원생이 이제 30만명에 이른다. 인문사회계도 팽창했다. 반면 정규직 일자리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취업 못 한 박사가 넘친다. 정규직 교수는 대개 미국 박사들 몫이다. 남는 자리 약간과 각종 비정규직 자리가 국내 박사에게 돌아간다. 요즘은 그마저 절대 부족하단다. 대학 밖 독립 연구자가 더 많아진 이유다.
독립 연구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두가지 ‘전형’이 있을 법하다. 한편으로 이들은 대학 체제에서 배제된 존재다. 정규직 자리를 원하며 비정규직 자리를 전전하지만, 너무 어려우니 차츰 포기하게 된다. 평생 불안정한 삶이다. 어렵사리 정규직 자리를 얻는 경우도 있다. 내가 그랬듯. 개인에게는 다행이지만 그게 해결책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대학 체제가 요구하는 과잉 경쟁과 획일화된 연구 시스템에 맞서는 저항자들이다. 작성자와 심사자만 읽는다는 비판도 받는 연구재단 등재지 논문 쓰기에 몰두하는 대신, 자유롭고 비판적인 연구를 통해 세상에 기여하려 한다. 경제적 가치와 별개로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지식을 생산하려 애쓴다. 대안 연구 모임을 만들고, 책 쓰고 강연한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는 이들도 있다. 삶과 공부를 일치시키려는 이들도 적지 않다.
두 전형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한 사람 안에 두 갈래 지향이 공존할 수도 있다. 나도 그랬다. 요컨대 독립 연구자도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한 면만 보고 다른 면을 재단하기는 어렵다.
다양성과는 별개로 독립 연구자들이 부딪히는 공통의 문제가 있다. 바로 삶의 불안정이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보고서 ‘대학 밖 학술단체에 대한 현황조사와 불안정 연구자를 위한 지원 및 연구안전망 구축 방안 연구’(2023)에 따르면, 비정규, 불안정 연구자들의 월 소득은 100만~200만원 미만이 33.8%로 가장 많다. 그해 최저임금도 못 된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응답도 67.8%에 이른다. 한국은 부자 나라가 됐지만, 돈 안 되는 공부에 대한 태도는 더없이 야박하다. 이 곳간에서는 인심이 안 난다. 연구자복지법 등 대책을 요구한 게 여러해 전이지만 정치권은 모르쇠다. 대학 팽창은 정부와 대학이 결정한 일이지만 어려움은 개인 몫이다. 답답한 독립 연구자들이 연구자공제회 만들기에 나섰다. 회비를 모아 상조와 의료지원 등 일상 서비스와 연구 데이터베이스 이용 등 연구지원에 사용하자는 계획이다. 정규직 교수들이 외면하지 말고 도우면 좋겠다.
“내가 힘드니 너도 힘들어야 한다”가 시대정신인 세상이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요즘 대학은 온갖 연구과제, 지원 사업 수행으로 살아남으려 정신이 없다. 등재지, 에스시아이(SCI) 논문 의무 편수 채우기에도 숨가쁘다. 교육과 연구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소망은 사치가 된 지 오래다. 취직 안되는 인문사회계에서는 대학원생이 방목되고, 취직 잘되는 이공계에서는 착취가 공공연하다. 얼마 전에도 한 대학에서 비극적인 죽음이 있었다. 지식 공장이 된 대학에서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지식 공장의 경쟁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독립 연구자들에게서 수많은 단행본 연구서와 두꺼운 번역서가, 대중과 소통하는 교양서가,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기록작업이 나온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서 한강 작가는 5·18을 기록한 수많은 구술채록과 자료집을 읽고 책을 썼다고 밝힌다. 이름 없는 독립 연구자와 기록 활동가들이 쌓은 토대 없이 노벨상은 가능하지 않았다.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인 수십권의 책 중 3분의 2쯤이 대학 밖 연구자들의 작업이다. 이들이 없다면 한국의 지식 생태계는 얼마나 앙상할까?
20세기 영어권을 대표하는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대표작 ‘화이트칼라’(1951)에서 연구 용역 수주와 경상비 관리에 여념이 없는 ‘기업가형 대학교수’를 분석한다. 미국의 사회과학자들이 막 정부와 기업의 용역 수행자로 전환되던 무렵이었다. 이제 일부 사회학자는 “사회적 과정에서 상처 입은 인간적 결과에는 관심이 없다”고 밀스는 비판한다. 21세기 한국은 어떨까? 권력과 돈에 맞서는 독립성은 중세 이래 대학의 본질적 가치였다. 그 가치가 인간의 삶이 개선되는 데 기여한 바 컸다. 오늘날 독립성은 대학에서 밀려난 이들의 몫이 되었다. 연구자공제회도 그 몫을 다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묵묵히 공부하고 나지막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 덕분에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진다고 나는 믿는다.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 2025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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