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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힘센 '사실' 앞, 기억하는 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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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09-05 12:46 조회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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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18일 낮, 도쿄 상공에 비행기 여러대가 떴다. 진주만 기습 이후 태평양이 일본의 앞마당인 시절이었다. ‘황군’의 훈련일까, 구경꾼이 모였다.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졌다. 제임스 둘리틀 중령이 이끄는 미군의 첫 반격이었다. 육군 폭격기가 항공모함에서 발진해 폭격을 한다는 기상천외의 작전이었다. 수도에 폭탄을 맞은 일본의 충격이 컸다.


폭격을 목격한 이들 중에 조선의 지도자 여운형이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 목격담을 은밀히 전했다. 미국 라디오 내용도 곁들여 일본의 물자 부족으로 전쟁이 빨리 종결되리라고 전망했다. 도쿄 폭격 소문이 퍼져나갔다. 여운형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헌병대에 체포된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들은 일본의 패배를 예상치 못했다고 변명했다. 1930년대 말부터 숱한 지식인, 엘리트가 신념을 버리고 전향했다. 변신의 논리도 나왔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서구의 20세기를 ‘사실의 세기’라며 자기비판한 것을 문학평론가 백철이 ‘사실수리론’으로 속류화했다. 예전에 불의했던 것도 사실이 된 이상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다. 그렇게 힘센 ‘사실’을 받아들인 엘리트들이 전쟁에 나가라며 연설도 하고 글도 썼다.


‘다른 사실’을 보려 애쓴 이들도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 지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밤공기 속에 안개 퍼지듯 퍼져나갔다. 1943년 4월, 함남 홍원에 사는 강동모(37살)는 “미국은 군수공업이 발달하여 매월 수천대의 비행기를 제작하고 있으므로 … 수만대의 적 비행기가 일거에 내습하면 일본은 모두 패배하게 되니, 그때야말로 우리 조선 동포가 봉기해야 할 호기”라는 이야기를 퍼뜨리다가 검거됐다. 해안에 연합국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풍문도 돌았다. 연합군이 상륙할 때 “양복을 입으면 일본인과 구별되지 않으므로 조선인은 조선복을 입어야 한다”는 지침도 퍼졌다. 일본 경찰의 비밀자료 속 내용들이다.


여운형은 1944년 8월, 좌우의 동지를 규합해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다. 공장, 학교, 회사 등에 세포조직을 건설하니 맹원이 1만명에 달했다. 해방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수립되는 바탕이 됐다. 항일 무력전도 준비했다. 중국 옌안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과 연락하고, 1945년 5월에는 박승환을 파견해 협동작전을 의논했다. 충칭 임시정부에도 요원을 파견했지만, 일본의 감시망을 뚫지 못했다.


가슴 뜨거운 개인들도 움직였다. 학병으로 끌려간 장준하, 김준엽 등은 1944년 중국 쉬저우에서 탈출해 장장 7개월을 걸어 충칭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합류했다. 박승환이 옌안에 갔던 때 학병 위문단으로 동원돼 북중국을 순회하던 작가 김사량도 베이징을 탈출해 옌안으로 향했다. 탈출에서부터 조선의용군 입대와 훈련까지 역정이 수기 ‘노마만리’에 생생하다.


올해도 8월15일을 지나며 어김없이 역사 전쟁이 불붙었다. “해방은 연합군의 선물”이라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기념사가 불을 지폈다. 윤봉길 의사가 유서에서 아들들에게 발명가가 되라고 했다며 역사의 이면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력 양성을 위해 친일 협력이 불가피했다고 강조해온 뉴라이트 사관의 연장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실제 유서는 첫 문장이 “반드시 …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였다. 발명가가 되라는 말은 없다. 맹자, 나폴레옹, 에디슨처럼 훌륭한 어머니를 따르라는 당부였을 뿐이다.


뻔한 왜곡에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임시정부 법통계승론에 대한 부정은 역사 내란이라며 척결하겠다고 나섰다. 취지는 이해하나 부적절한 발언이다. 임시정부 법통계승론은 신성불가침이 아니다. 임정 법통계승을 제헌헌법에 명기한 것은 이승만이었다. 반면 백범은 “현재의 반조각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며 법통계승론을 비판했다. 백범사상연구소를 이끈 백기완은 임시정부를 “국권의 동일성 내지 지속성의 유지라는 낡은 의제와 법통 의식의 틀에서 탈피시켜 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 전환”시킨 데서 백범의 공을 찾았다.


임시정부와 광복군 못지않게 조선건국동맹도, 조선독립동맹도 치열하게 투쟁했다. 독립운동 폄훼에 맞서려면 임정 법통론에 매달리기보다는 ‘더 많은 독립운동’에 대한 긍정이 필요하다. 건국절 논란에 휘말리며 논란이 법적 정통성 여부로 축소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전쟁이 깊어질수록 강성한 일본에 협력하여 실력을 키우자는 지식인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일본인 다음가는 ‘이등국민’이 되어 서러운 신세를 벗어나자는 이들도 늘어갔다. 모두가 그런 꿈을 꾼 건 아니다.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일제 말기(1937~1945)에 적발된 불온낙서 중 1위가 이완용 비판, 2위가 천황 비판, 3위가 미나미 지로 총독 비판이었다. 조선인은 일본인은 꿈도 못 꿀 ‘천황 바보’ 같은 낙서를 썼다. 내선일체는 허망한 꿈이었다.


‘사실’이 어떻든 옳은 일을 하려 애쓴 이들도 있었다. 영국인으로서 일본군 포로가 됐던 앨리스터 어커트는 90살이 넘어 남긴 회고록에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당한 학대를 고발한다. 이등병 아래 최말단 포로감시원은 잘 때리라고 늘 맞았다. 그래도 학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타이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근무하던 포로감시원 김주식은 1944년 10월, 영국군 포로들과 함께 탈출해 중국으로 향하다 체포됐다. 이듬해 형장의 이슬이 됐다. 1944년 말, 인도네시아의 포로감시원 10여명은 비밀결사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했다. 그중 몇몇이 우발적으로 봉기했다가 죽고 나머지는 체포됐다. 수감 중 종전을 맞아 풀려났다.


훨씬 사소한 이야기도 있다. 어커트의 기억이다. 포로들은 곧잘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 이송됐는데, 질식할 것같이 끔찍한 경험이었다. 또다시 이송을 앞둔 어느 날, 포로들이 조선인 감시원에게 탈출하지 않을 테니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망설이던 감시원이 믿을 수 없게도 문을 열어두었다. 포로들은 자리를 바꿔가며 바람을 쐤다.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베푼 어느 조선인의 친절을 어커트는 평생 잊지 못하고 글로 남겼다. 이 사소한 행동을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약한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내 펜이 힘센 이들의 ‘사실’ 앞에 무력해질까 두려울 때면, 바로 이 마음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 2025년 8월 27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154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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