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 나를 가르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10-24 10:24 조회1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얼마 전 전북 익산의 자활센터에서 강연했을 때 일이다. 강연 주제가 ‘행복을 찾아서’였다. 행복과 쾌락의 구별, 관계 속 행복, 행복과 불평등의 관계 등을 설명하며 행복해질 방법을 찾아보자는 내용이었다. 내 소개 뒤에 참가자들의 짧은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초로의 여성이 말문을 열었다. 강의 내용이 궁금하다며 자신은 행복을 찾아서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박수를 쳤다. 그분이 물꼬를 튼 덕분인지 참가자 대부분이 기꺼이 자기소개를 했고, 수업 중에도 그분 덕에 두루 소통이 이어졌다.
마침 익산 가는 기차에서 읽은 책이 장남수 작가의 최근 에세이집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였다. 가난한 농가에서 자란 그는 ‘국민학교’ 졸업 후 열다섯살에 서울로 와서 여공이 됐다. 1970년대에 원풍모방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됐고, 이윽고 작가가 됐다. 배움의 꿈을 품은 채 쉰살에 대학에 입학했다. 올해 대학에 갔다는 익산의 여성분에게 나는 장남수 작가 이야기를 들려주며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최근 노숙인, 자활근로사업 참가자, 교도소 재소자 등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연을 자주 하고 있다. 올해부터 시작된 ‘디딤돌 인문학’ 사업의 일환이다. 이들에게 인문학 강연이 얼마나 의미 있을까, 힐링 인문학 유행에 편승하는 건 아닐까, 고민도 있지만 미력이나마 보태려는 중이다. 강연장에 가보면 반응이 제각각이다. 좋은 곳도 미지근한 곳도 있다. 질문에 답이 없으면 답답해지고, 그게 두려워 기다리지도 않고 지레 답을 내리곤 한다. 교사이자 계몽자라는 뿌리 깊은 자의식을 벗지 못하는 나 자신이 가장 큰 문제다.
참여 강사들 중 수강생들과 잘 소통하는 사례를 통해 조금씩 배운다. 특히 글쓰기, 그림 그리기 강좌의 반응이 좋은 듯하다. 작가들의 경험과 역량이 뒷받침되기도 하고, 배움의 욕구와 표현의 욕구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읽고 배우면 쓰고 드러내고 싶어지고, 그러다 보면 더 알고 싶어지는 법이다.
1980년대 노동문학의 선구자 격인 ‘빼앗긴 일터’(1984)에서 장남수는 풀 베고 소 몰다가 “책가방을 든 동창이나 하얀 옷깃의 여학생을 마주치면 견디기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열심히 책 읽고 이웃 언니에게 영어를 배우며 아픔을 견뎠다. 서울에서는 천막 야학을 다녔다. 지식인과의 만남이 그를 구원한 것일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원풍모방에서 일을 시작한 열아홉살 때, 그는 고향 갔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우연히 대학생 현우와 대화를 하게 된다. 문학 토론이 이어지며 마음이 통한다. 현우가 친구 맺기를 제안한다. 어디선가 대화가 헛돈다. 이를테면 현우는 도저히 못 믿겠다며 계속 묻는 것이다. “진짜 밤에도 일하니?” 그는 기가 막혔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행복한 것 아니냐는 현우에게 그 가난을 맛보고 싶어서 완행열차를 탄 거냐고 되묻는다. 결국 현우와는 잘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던 민주주의의 성지, 서울 수유리 4·19묘지에 가봐도 느낌이 없다. 섬유공장 노동자가 의식 있는 대학생을 만나 계몽된다는 서사는 여기에 없다. 장남수의 가슴에 불을 붙인 건 원풍모방에 다니던 언니가 구독 신청해준 잡지 ‘월간 대화’에서 읽은 ‘여공’ 석정남의 ‘불타는 눈물’이었고, 해고 노동자 유동우가 연재하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었다.
배움도 글쓰기도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어떤 이들에게 배움은 신분 상승의 길이고, 글쓰기는 자기만족이거나 자기를 현시하는 방편이다. 어떤 이들에게 배움은 좁은 틀을 넘어 세상으로 다가가는 길이고, 글쓰기는 자기 삶을 스스로 구성해나가는 주체적 행위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구별해도 되는 걸까? 배움과 글쓰기에 대한 꿈은 지식인이 분류하고 싶어 하는 서사들로 규정되기 전에 더 나은 삶을 찾으려는, 한없이 절실한 원형질의 욕망 같은 건 아닐까?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은 ‘가난할 권리’에서 탈학교 청소년이 다니는 이음학교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교실은 참담하고 강사들은 한두달을 못 버틴다. 힘들게 버티던 어느 날 한 아이가 다가와 필기 노트를 내민다. 대화가 이어지고 아이가 묻는다. “선생님, 저도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그러고 싶어요.” 아이는 끝내 최후의 다섯명이 되어 졸업식에 참가한다. 학생도, 가족도, 교사도 울다가 서로 끌어안는다.
대학이 답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대학도 나오고 박사도 딴 사람들이 대학이 답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이상하다. 현직 교사 강지나의 책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에 등장하는 소희는 “저는 절실하게 대학에 가서 잘되고 싶었어요” 하고 말한다. 대학은 참혹한 삶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처럼 보인다. 책은 대학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대학을 나와도 빈곤과 불행은 해결되지 않는다. 책은 배움을 향한 열망이, 더 좋은 삶을 향한 의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줄 따름이다. 지난해 초 타이 매솟에 있는 미얀마 난민촌을 지지 방문했을 때였다. 난민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의 고교 과정 교실에서 한국에 관심이 많다는 학생을 만났다. “한국에 가고 싶어요?” 하고 묻자 학생이 대답했다.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요. 일하고 싶지는 않고요.” 머리가 띵했다.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라는 전형적인 미래를 그리던 내 고정 관념이 부끄러워졌다.
‘가정환경 조사’라는 이름의 폭력이 횡행하던 시절, 집에서는 부모의 학력란에 고졸과 중졸이라고 적어주시곤 했다. 국졸이던 아버지는 평생 책을 읽었고, 과장 좀 보태면 영어사전을 외우다시피 했다. 국민학교를 마치지 못한 어머니는 예순이 넘어 중졸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학력인정 시설에서 고교 과정까지 다녔다. 평생 노동하는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영어를 읽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기뻐하셔서 기뻤다.
배우고 글 쓰며 변하는 것은 배우는 이들만이 아니다. 가르치는 이들도 배운다. 내 지식의 두께가 더 깊어지기보다는 더 절실해지면 좋겠다. 익산의 자활센터에서 만난 여성분께 장남수 작가의 책을 부쳤다. 응원의 마음을 담았다고 썼다. 감사의 마음도 담았다고 쓰는 걸 잊었다. 사실 응원을 받은 쪽은 나였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조형근 사회학자
한겨레 2025년 9월 30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