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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예술, 게임,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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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10-24 10:24 조회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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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와 대적해 1대4로 진 이세돌이 은퇴하며 말했다 "바둑을 예술로 배웠고 예술엔 정답이 없다 AI가 정답 주며 아름다움이 사라졌다" 


법률가 고민도 같아서 재판을 게임으로 보면 AI에 물으면 되고 예술의 관점으로 보면 소통하고 협력하며 최선의 결론을 찾는 과정이라 생각할 것 


예술이냐, 게임이냐 선택할 시기가 왔다


2016년 3월, 벌써 10년이 지났다. 엊그제 같은 그 바둑 행사는 인류 역사에 상징적 의미를 남겼다. 이세돌과 알파고가 광화문 포시즌호텔 특별대국장에서 대결을 펼칠 때만 해도, 장기나 체스는 모르지만 바둑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고 믿었다. 이세돌 스스로 4:1이나 5:0으로 이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충격 속에서 반짝 했던 1승은 희망이라고 할 수는 없고, 인류의 패전 기념품 정도였다. 그 1승은 놀랍게도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황급히 깨닫고, 알파고의 버그를 유발할 의도로 둔 기상천외한 한 수가 이룬 것이다.


장면들을 종합해 보면 알파고가 대결 상대로 왜 이세돌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된다. 당시 이세돌은 세계 랭킹 1위가 아니었다. 이미 몇 년 전 박정환에게 정상의 자리를 내 주었고, 그것마저 다시 커제에게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구글 딥마인드가 내리막 길의 이세돌을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세계 1인자로 군림하면서 가장 많은 데이터를 보유한 기사였다. 창의적이고 독특한 스타일에 변칙 플레이도 능숙했다. 알파고의 능력이 급속도로 증강하자 딥마인드의 개발자들도 자기들 능력으로는 정확한 점검이 불가능했다. 알파고의 결점을 발견해 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이세돌이라 판단했다.


그들의 선택은 최선이었고, 이벤트는 의도대로 역사적 대국이 되었다. 1승 4패, 네 번째 대국에서 기묘한 1승을 거두고 30대의 이세돌은 은퇴를 선언했다. 결심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바둑을 일종의 예술로 배웠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탐구할 여지가 있었다. 무언가 자기만의 것을 추구해 가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AI의 등장으로 모든 대국에는 정답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는 모르지만 AI는 정확히 안다. 매혹의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렸다.”


정답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 한 판 대국의 결과만 있을 뿐이며, 결과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프로기사의 정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답이 있는데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돌을 놓아야 한다면, 허망하다.


법률가들은 고민을 재판의 세계에 대입해 본다. 지난날에는 분쟁에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재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선고라는 결론에 도달해도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른다. 옳다고 여기는 결론을 정의라는 거창한 관념이 감싸주기만 바랐다. 정답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어려울수록 법률가들의 전문성은 깊어 보이고 법관의 권위도 높게 느껴 졌다.


재판의 대상이 되는 분쟁을 단일값의 원칙이 지배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파악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해답이 정해져 있지 않거나 두 개 이상일 수 있다면, 소송 과정에 참여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긴다. 재판 절차를 서로 실마리를 풀어가는 소통의 마당으로 이해하고 주장을 정당화하는 법률적 근거를 구축해 나아가는 투쟁과 협업이 뒤섞이는 과정으로 합의한다면, 그런 재판은 예술 같은 재판이 될 것이다. 그런 이상적인 재판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종전의 고리타분한 정의의 관념에 사로잡혀 물불 가리지 않고 승리만 의미 있는 결론이라는 태도로 재판제도를 대한다면, 그 정답은 AI에 묻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재판을 정답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장차 AI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소 부당한 결론에 이를지 모르나 정의 관념에 부합하는 사실의 재구성으로 절차상 승복할 수밖에 없는 재판을 유지하자면, 기존의 방식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태야 한다. 우리가 재판 제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이냐를 선택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재판을 예술로 볼 것인가, 게임으로 여길 것인가.


차병직 변호사(법률신문 편집인) 


법률신문 2025년 9월 3일 


https://www.lawtimes.co.kr/opinion/21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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