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엽] 남북관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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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12-12 14:19 조회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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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은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이라 경계했다. 이 구절은 요즘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겨냥한다. 남북관계의 주류 담론과 정책 결정권을 쥔 외교·안보 전문가, 이른바 ‘북한 전문가’라는 이들이 과거의 성취와 기억에만 안주하며 변화하는 국제 질서와 북한의 전략 변화를 읽지 못한 채 여전히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은 심각한 문제다. 과거의 합의와 성과를 반복 기념하는 데 그치고, 반성과 쇄신은 사라졌다.
남북은 수많은 합의와 성과를 쌓아왔다. 7·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선언, 그리고 판문점 선언과 평양 선언까지 각각의 합의는 당시 국제 환경과 남북관계의 조건 속에서 나름의 진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한 국제 질서와 북한의 전략 환경은 그 시절과 전혀 다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국제 규범의 붕괴, 미·중·러 전략 경쟁의 가속화 속에서 북한 김정은 정권은 ‘민족 공조’ 담론을 접고, 남한을 적대적 교전국으로 규정하는 ‘두 국가론’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남북관계는 과거 민족의 프레임이 작동하던 시절과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런데도 우리의 외교·안보·통일정책 논의는 여전히 과거의 성취와 언어에 매여 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지만, 대통령 주변의 외교안보 참모와 전문가들은 과거의 합의와 경험에 안주하며 변화하는 국제 질서와 이에 조응한 북한의 전략적 메시지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 질서의 지각 변동과 북한의 노선 전환을 읽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과 “합의 복원”이라는 주문만 반복하며 여전히 비핵화를 위한 북미대화에 기대고 있다. 나무 그루터기에서 우연히 토끼를 얻었던 경험에 집착해 변화한 들판을 외면하는 ‘수주대토’(守株待兔)의 고사처럼 안일하고 답답한 모양새다.
물론 과거의 합의와 성취를 부정하거나 박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규범적 가치와 역사적 교훈은 분명 소중한 자산이다. 과거 합의들이 담고 있는 ‘상호 불가침’, ‘평화적 해결 원칙’, ‘교류 협력의 정신’ 등 규범적 가치는 북한의 태도 변화와 무관하게 우리가 견지해야 할 중요한 원칙이자 자산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원칙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려던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의 합의가 남북관계 발전의 중요한 발판이 되려면 거기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그럼에도 과거의 성과가 ‘현재를 설명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틀’이 아니라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패막이’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십 년간 남북문제를 독점해 온 전문가와 정책 엘리트들은 과거의 언어와 권위를 무기로 새로운 세대와 상상력을 밀어내고 있다. 그 결과, 남북관계의 정책 담론은 활력을 잃고 경직되어 버렸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영광을 되풀이하는 기념식이 아니라 냉정한 성찰이다. 김정은 정권의 ‘적대적 두 국가론’은 단순한 대남 비난이 아니라, 체제 전략의 구조적 전환이다. 이를 읽어내고 대응 전략을 짜야 할 사람들이 과거 합의의 문구와 성과를 되뇌는 데만 몰두한다면, 정책은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표류할 수밖에 없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뜻이지만, 오늘 우리의 모습은 ‘온고’만 있고 ‘지신’은 없다. 과거의 합의 가치를 계승하고 교훈을 얻는 ‘온고’의 과정은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변화된 현실을 외면한 채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지신’을 가로막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남북관계의 새로운 질서와 북한의 전략 변화를 읽지 못한 채 과거 합의의 기득권에 매달리는 전문가와 정책 엘리트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지금의 한반도 정세를 20년 전의 언어와 사고로 설명할 수 있는가? ‘기억의 정치’에 갇힌 이들이 정책을 주도한다면, 남북관계의 미래는 또다시 반복과 답보의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
이제는 무능과 나태, 지적 오만의 ‘고인물’을 흔들어야 한다. 과거의 성취에 안주한 채 현재의 위기와 미래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이들에게 정책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변화하는 국제 질서와 북한 전략에 대한 정확한 독해와 새로운 서사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담대한 전환이 절실하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겨레 2025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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