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엽] 기억의 정치에서 책임의 정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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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25-12-12 14:19 조회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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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엘 아카드의 <훗날, 모두가 ‘늘 반대했어’라고 말하리라>는 가자 사태에 침묵하거나 방관해온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위선과 기억의 정치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는 언젠가 모두가 “우리는 그때 늘 반대했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현실에서 침묵했던 이들이 미래에는 늘 정의의 편에 서 있었다고 기억을 재구성하는 방식이 서구 자유주의의 교묘한 자기기만이라는 것이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책을 주도하는 정책엘리트들의 행태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2018년, 우리는 새로운 평화를 만들 기회를 가졌지만 실패했다. 당시 정책 엘리트들의 회고록과 대담집을 보면, 실패의 구조적 원인을 냉정하게 성찰하기보다 북한, 트럼프, 미국 등 외부 요인으로 돌리며 자기 담론의 안전지대로 후퇴했다. 가자 사태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며 책임을 회피했던 서구 자유주의자들과 다르지 않다. 침묵과 회피로 과거의 책임을 미루고 현재의 자리를 지키며 ‘우리는 늘 옳았다’고 되뇌는 모습이 겹친다.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한반도 주류 정책 엘리트들은 과거의 성취에 안주한 채 새로운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6.15와 10.4 선언, 판문점·평양 선언은 분명 그 시대에 의미 있는 성취였지만, 그 성공이 오히려 현재의 상상력을 가두고 있다. 북한의 전략이나 국제 정세가 변해도 과거 경로의 복원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이 굳어졌다. 다른 길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정체성과 업적을 부정하는 일이 돼버렸다. 과거의 성취는 미래 설계의 토대가 아니라 기득권의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
하지만 국제 질서와 북한의 전략 환경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김정은 정권은 ‘민족 공조’의 언어를 폐기하고 ‘두 국가론’으로 전환했다. 미·중·러 경쟁과 트럼프의 귀환은 전혀 다른 조건을 만들었다. 과거 남북관계를 규정했던 ‘통일’ ‘민족공조’ 같은 언어는 지금의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언어에 자신들의 자산을 투자해온 전문가들에게 ‘두 국가론’은 존재 기반을 흔드는 불편한 현실이다.
지금 정책 결정권과 담론 공간을 쥐고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언어를 만들기보다 기존 언어의 유효성을 강변하며 현실을 외면하는 쪽이 유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북미대화”, “비핵화”, “합의 복원”만 반복하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주도하는 담론의 독점은 새로운 세대와 다른 목소리를 밀어내며 담론의 활력을 고갈시켰다. 그 결과, 국민주권정부를 자처하면서도 국민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았다. 주변화된 주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지 않으면 새로운 상상력은 나오지 않는다.
반성 없이 과거의 성취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변화된 국제질서와 북한 전략을 읽어내고 새로운 언어와 서사, 책임의 정치를 세우지 않는다면 한반도 정책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엘 아카드의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그때 우리는 늘 잘했어”라는 기억의 정치에 기대어 오늘을 살며 미래를 답습할 것이다.
‘민족’이라는 신화가 아닌 ‘두 국가’라는 현실 위에서 평화를 새롭게 정의하고, 추상적 비핵화에 매몰되지 않는 현실적 위협 관리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낯익은 기억의 언어가 아닌 낯설지만 정직한 언어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항해가 시작될 수 있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경남도민일보 2025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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